[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나는 집보다 까페가 좋고, 까페보다 들판이 좋고, 들판보다 생각의 자유가 좋다. 그 어디든, 생각과 글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고통이다. 펜이 있고, 종이가 있고, 노트북이 있어도 생각의 각도가 진행되지 않으면 갇힌 것이다. 글쓰는 고통은 거기서 비롯된다. 갇힘에서 얻은 자유의 참맛은 모든 고통이 주는 선물이다.
면장(免墻)은 “알아야 면장한다”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공자의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말이다.
양화陽貨<10>
子謂伯魚曰, 女爲周南召南矣乎?
人而不爲周南召南,其猶正牆面而立也與?
공자가 백어에게 말하길, 너는 주남과 소남을 아느냐?
사람이 주남과 소의도 모르면, 그것은 담장을 마주 보는 것과 같다.
면장(面墻)은 담을 마주본다는 말이고, 면장(免墻)은 담을 넘어선다는 말이다. 넘어서려면, 담을 마주하고 있음을 먼저 인지해야한다. 인지함이 곧 넘어섬의 시작이다. 문이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벗어남은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것이다. 갇힘은 그런데서 효력을 발휘한다. 나는 날마다 나의 위치를 자각하고, 모순과 장점과 방향에 대해 진지하고 고민하면서 진화(進化)를 추구해 왔다. 막혔던 막다른 골목을 마주할 때마다, 그 골목끝이 내안의 것들로 귀결될 때마다, 나는 벗어나길 간절히 사모하였고, 그리하여 여기에 지금 내가 있다. 여기는 중랑천 자연 까페이다.
멀리 경운기(耕耘機)가 보인다. 경운기는 밭을 가는 기계이다. 경운(耕耘)은 밭을 쟁기질한다는 의미인데, 과거에 황소가 했던 일이다. 남(男)은 밭에서 힘쓴다는 뜻이지만, 본질은 밭에서 쟁기질한다는 의미다. 力은 쟁기의 상형글자이다. 밭에서 쟁기질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남자였고, 남자 노예가 그것을 담당했다. 전쟁을 해서 붙잡힌 남자 노예들은 밭에서 쟁기를 끌었고, 여자 노예들은 집안 살림을 거들었다. 奴와 男은 거기서 유래된 것이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이제 사람이 밭을 갈지 않는다.
내 고향에서 나의 아버지도 경운기로 밭을 갈았다. 얼마전 고향에 내려가니 내 막내는 더 이상 경운기로 밭을 갈지 않았다. 트랙터로 운전하듯이 밭을 가는데, 현대사회의 문명이 만들어낸 위대한 기적앞에 ‘농사도 과학이다’고 인정해야 했다. 시골도 그렇게 새롭게 발전하면서 도시가 모르는 세련된 방향으로 부유한 농부로 만들었다. 멀리 보이는 경운기와 밭가는 소리를 들으니, 내가 있는 곳이 자연속임을 더욱 깨닫는다.
집보다 까페를 좋아하는 이유는 새로움과 시끄러움 때문이다. 언론인으로서 취재활동을 하다보니, 그때 사람을 접하는 것에 익숙하고, 습관이 들여져 있다. 지금은 취재활동보다 글쓰는 일에 집중하면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노트북을 펼쳐야 글이 흘러나오는 반사신경이 만들어진 것 같다. 집에 있으면 드라마를 보면서 노트를 필기하고 싶고, 까페에 가면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고 싶은 심리가 작동한다. 오늘은 까페를 확장해서, 자연속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그동안 밀렸던 많은 일들을 정리하고 있다.
담이 없다는 것, 공간의 벽이 없다는 것, 그래서 하늘이 보이고, 차소리가 들리고, 소음이 소음으로 들리지 않으면서 새들의 날개가 내게 희망으로 펼쳐져 보이는 것, 곤충소리는 바람으로 느껴지고, 땅에는 나뭇잎의 그림자들이 하늘거리며, 모든 만물이 살아서 움직이는 이 아름다운 풍경의 화가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삶이 내게 허락되어서 나는 다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나는 인간 달팽이로서 자연속에 예속된다. 집에는 달팽이가 30마리로 늘었다. 본래 1마리만 키웠는데, 어느날 찾아온 1마리, 그리고 중랑천에서 발견한 1마리, 봄이 되면서 내가 달팽이를 위해 식물을 캐려고 뿌리를 든 그 순간 달팽이 가족이 발견되어서 마음이 쓰여 데리고 오다보니 숫자가 대가족이 되었다. 배추상자의 배추밭은 달팽이의 식성을 따라잡지 못한다. 숫자가 많을수록 해야할 일이 많고, 달팽이의 희소성도 줄어드는 반면, 내가 처음 발견한 2마리는 기존 달팽이와 다르게 민달팽이라서 늘 관심이 간다. 모든 달팽이들이 자신의 집을 껍질로 가지고 있는데, 오직 2마리만 집이 없으니 그 두 마리가 내겐 더욱 귀하다. 맨 처음 만난 것도 가치있고, 다른 달팽이들이 없는 것이 있어서 가치있다. 모양의 다름도 특별함이다. 그 무엇을 가졌다는 것과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두가지는 모두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인정한다.
오늘도 나는 나를 마주하며 면장(免墻)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