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여불위(呂不韋)는 진시황제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마침표를 찍는 진시황제의 출생 비밀은 드라마틱하며, 황당하며, 어이없고, 유전자DNA 검사가 없는 춘추전국시대여서 가능했을 이야기다. 요즘은 통할 수가 없다. 여불위는 기업가이며, 킹메이커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여불위는 상인이었다. 상(商)은 주나라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상품을 만드는 재주가 있어서 물건을 팔아 유통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상인(商人)은 상나라 사람을 말한다. 여불위가 상(商)의 출신은 아니겠지만, 여하튼 여불위는 상인이었고,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국제적 정치감각이 남달랐다.
어느날,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온 ‘자초’(子楚)를 만나고서 ‘기화’(奇貨)라고 판단했다. 기화(奇貨)는 기막힌 보화로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일컫는다. 산속에서 산삼을 만났는데, 산삼이 밭을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충분히 투자해서 승부수를 던져볼 게임이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킹메이커를 의미한다.
여불위(呂不韋)는 ‘등뼈가 없는 가죽’으로서 상당히 부드러운 가죽이다. 옛날에 가죽옷은 귀족을 상징한다. 또한 여불위에서 ‘불위’가 불휘-뿌리의 발음으로 이어진다. 여씨의 뿌리같은 존재를 의미한다. 여불위는 자초를 만나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한다.
자초와 계약을 단단히 체결하고, 후원자로서 5백금을 자초에게 제공한다. 조나라에서 귀족층 자녀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정치적 인맥을 구축하기 위해서이다. 조나라에 붙잡힌 볼모이지만, 자유가 허락되었으니 경제적 후원만 있다면 여유로운 유학생활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초가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나 당시는 전쟁시대였고, 기회의 새는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다. 마치 주식이 대박이 나듯 그러했다. 자초는 진소왕의 둘째 아들 안국군의 20명 아들중의 1명이었다. 자초의 어머니는 하희였는데, 안국군의 사랑조차 받지 못했다. 상황이 이러니, 자초가 왕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자초입장에서는 여불위의 동아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자초가 정말로 왕이 된다면 나라의 절반을 준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상황이었다.
일이 되려면 물흐르듯 진행되듯, 진나라 태자가 전쟁중에 사망했다. 진소왕은 둘째 아들 안국군을 태자로 책봉했다. 안국군의 정부인은 화양부인이다. 안국군이 황제가 된다면 화양부인은 황후가 된다. 그런데, 그녀에게 자식이 없었다. 후사가 없으면 다른 부인들이 정치적 음모를 꾸밀 수도 있으니 불안한 권력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을 간파한 여불위는 화양부인과 빅딜을 결심한다.
안국군의 태자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그 결정권은 전적으로 화양부인이 쥐고 있었다. 화양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은 그녀의 언니라는 정보도 수집해서 알게 됐다. 여불위는 먼저 화양부인 언니를 접촉해서 많은 귀금속으로 마음을 빼앗고, 자초에 대해서 소개한다. 이어 화양부인 언니가 화양부인과 여불위의 만남을 주선했다.
여불위 曰, “먼 타향에 있는 자초 공자는 고향땅을 그리워할 때마다 화양부인을 가장 보고싶다고 말을 전해왔습니다. 평소 너그러운 인품으로 웃어주시고, 덕담을 해주셨던 것이 마음에 남아, 화양부인의 얼굴을 하루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자초 공자는 요즘 조나라에서 실력있는 귀족들 자제들과 토론도 하고, 그 지역 문화탐방도 하면서 유학생활에 여념이 없습니다. 모두 화양부인의 덕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습니다.”
화양부인 언니 曰, “왕께서 언니를 지극히 사랑하지만, 나이가 들면 꽃이 지듯 아름다움도 없어지니 왕의 사랑이 떠날 것입니다. 사랑이 끊기면 왕께 말한마디 건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때를 대비하지 않으면 말년에 생각지 못한 불운이 닥칠 것입니다. 왕의 아들들 중에서 언니에게 효도하는 자를 선택해서, 양자로 삼아 태자로 책봉한다면 훗날 언니의 여생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기회는 지금 이때뿐입니다. 들어보니 자초가 언니를 그리워하고, 지혜롭고, 인품이 훌륭하다고 하니 꼭 천거해서 태자로 책봉하게 하세요. 언니는 없는 아들을 얻어서 좋고, 자초는 없는 나라를 얻어서 좋으니 서로가 윈윈이 아니겠어요?”
모든 권력은 사랑의 침실에서 이뤄진다. 베개가 곧 왕권이다. 왕의 머리가 놓이는 곳이니, 베개가 있는 침실에서 왕의 후계자가 결정된다. 진시황제도 이렇게 왕이 되었다. 진시황제의 아버지는 자초(子楚)이다. 자초는 호적상 아버지이고, 여불위는 생물학적 아버지이다. 자초가 아직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을 때, 화양부인은 안국군과 사랑을 나누면서, 자초를 양자로 허락해달라고 부탁한다. 안국군이 허락하니, 자초가 곧 태자로 책봉되었다.
조나라에 망명중이 자초는 여불위 덕분에 태자가 되었으니, 여불위는 생명의 은인이며, 킹메이커로서 든든한 후견인이며, 멘토였다. 축하파티를 즐기는데, 여불위의 아름다운 첩이 술을 따른다. 그녀의 이름은 ‘미희’였다. 여불위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있던 미희는 당시 임신중이었다. 자초는 이것도 모르고, 미희를 달라고 한다. 여불위가 거절했어야하는데, 이때 OK를 하고 미희와 여불위는 거대한 비밀을 숨긴다. 자초와 결혼한 미희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정(政)이고 훗날 진시황제가 된다.
진소왕의 장례식과 추모기간 1년이 지나고 비로소 안국군(효문왕)이 왕으로 즉위한 후 3일만에 사망한다. 자초가 바로 왕이 되는데 그가 바로 장양왕이다. 장양왕(莊襄王)은 풀이 무성할 장(莊)과 높을 양(襄)이니, 풀처럼 낮았던 자초가 높고 높은 왕이 된 것을 의미한다. 자초는 왕이 되자 양어머니 화양부인을 ‘화양태후’로 모시고, 친어머니 하희를 ‘하태후’(夏太后)로 높였고,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로 임명하고 하남과 낙양의 10만호를 식읍으로 하사했다. 강동구 천호(千戶)는 1000개의 집을 의미하니, 천호동의 100배가 되는 땅을 하사한 것이다. 10만호는 대가족 시대에 1호는 10명으로 잡으면 100만명 대도시이다. 여불위에게 100만명 대도시의 모든 식읍을 내린 것이다.
문제는 장양왕이 3년만에 죽은 것이다. 당시 정(政)은 13살, 여불위가 흥선대원군처럼 대리청정을 할 수 있었다. 여불위는 상국(相國)이 되었고, 중보(仲父)라고 불렸다. 정(政)은 정치할 정(政)이다. 진시황제의 두뇌가 얼마나 총명했는지, 여불위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니 영특함은 타고 났을 것이다. 성장하면서 진시황제와 여불위의 얼굴이 점점 닮아가니… 이것을 어쩌랴? 여하튼, 진소왕-효문왕-장양왕-진시황제로 이어지는 왕권계승에는 여불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여불위의 공로가 남의 일에 불과했다. 그가 태어나기전에 진행된 일이기 때문이다.
장양왕이 일찍 죽었으니 졸지에 과부가 된 미희는 태후자리가 가시방석이다. 본래 출신이 연예인이었으니, 혼자 산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재혼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미희는 여불위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이 다시 만나니 정(情)이 불탔고, 훗날 무슨 말이 나올까봐 여불위는 방책을 마련했다. 노애라는 남자를 ‘환관’이라고 속여, 미희의 내시로 들여보낸 것이다. 진시황제의 생모인 미희는 노애를 맞아, 아들 둘을 낳았고, 임신중에 궁궐을 떠나 옛수도 옹(雍)에 머물렀다. 시진시황황제 9년에 미희가 아들 둘을 낳았다는 사실이 발각되고, 노애를 잡아서 벗겨보니 남근(男根)이 있었다. 고문(拷問)하니, 배후에 여불위가 있음이 들통났다.
21살 젊고 패기있는 진시황제는 여불위의 존재가 장애물과 같았다. 장양왕은 힘없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왕이 되었으니 여불위의 존재가 하늘이겠지만, 진시황제에게는 여불위가 ‘황제위에 군림하는 황제’로 여겨졌다. 노애사건으로 여불위를 처단하고 싶지만, 궁궐내에 여불위의 세력이 상당하니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우선 상왕의 직위에서 파면하고, 1년뒤 하남과 낙양의 식읍도 몰수한다. 이에 여불위는 자신의 때가 다 됐다고 판단하고, 음독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