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역사적으로 가장 영예로운 축복을 받을 자로 두 인물을 꼽는다면, 빌라도와 헤롯이었다. 그러나, 가장 저주를 받았다. 성경은 두 인물을 가장 비열하고, 악한 정치인으로 판결했다. 기회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칼(刀)이 기회라면, 권력의 칼을 빌라도와 헤롯은 생명을 살리는데 쓰지 않고, 생명의 주를 죽이는데 쓴 것이다.
예수님이 오실 때, 성전을 예비한 자는 헤롯왕이었고,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이스라엘을 통치한 권력자는 빌라도였다. 두 인물은 성경을 통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한 살인 미수범,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긴 살인범으로 기록되었다. 이런 저주가 또 어디에 있는가?
또 역사적으로 가장 영예로운 축복을 받은 자로 두 인물을 꼽는다면 아담과 하와이다. 그러나, 가장 저주를 받았다. 하나님이 최초로 사랑하고, 대화를 나눈 사람다운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두 인물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어긋나니, 그 끝은 비참했다. 기회를 얻는 것보다 어떻게 행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기회는 곧 ‘법’(法)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법을 통해 기회를 허락하시고, 그 진리의 법을 지키면 기회는 울타리가 되고, 법을 지키지 못하면 또한 기회가 울타리가 된다. 단지, 지킨 자는 울타리 안에 있고, 지키지 못한 자는 울타리 밖에 스스로 버려진다. 이것이 법(法)이다.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울타리를 구분과 지칭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태어나기까지 유럽은 혼란에서 질서로 점점점 좋아졌다. 예수님이 태어나면서 이스라엘도 정치적 독립은 얻지 못하였어도 종교적 독립은 얻을 정도로 유대교가 로마에서 인정받았다. 마치 한류가 중국과 미국과 유럽에 전파되듯 그 시대에 유대교가 로마에 인기가 높았다. 식민지 치하에 있는 국가 이스라엘에서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만 보더라도 로마가 얼마나 유대교를 특별히 평가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헤롯이 로마의 신임을 얻은 결과가 아니다. 헤롯은 로마의 신임을 잃을 뻔 했으나, 하나님의 사람이 태어남으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혜택이 다시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자, 동방박사를 보내서 유향과 몰약과 황금을 선물로 줬다. 그처럼 그 시대가 이미 은혜와 평화가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 북한에서 종교 지도자가 태어났고, 그때 국제연맹이 결성됐다. 그 국제연맹은 유명무실해졌다.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국제연맹은 곧 국제연합의 전신(前身)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한국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태어났고, 그때 국제연합(UN)이 다시 결성되었고, 그 국제연합(UN)은 지금까지 운행되고 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지금의 모든 길은 UN으로 통한다. 전쟁으로 끝날 것 같았던 인류문명이 새로운 기회를 얻었으니, 결국 하나님을 쳐다보면서 마땅히 어찌 살아야할지 가슴에 손을 얹고 깊게 생각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일 것이다.
빌라도가 황제가 될뻔 했다가 소환당해 자결하고, 훗날 성경과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로 낙인찍혔으니, 얼마나 슬픈 비극인가? 하나님의 사람은 맞으면 축복, 못 맞으면 저주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맞음과 외면은 자신의 마음에서 결정된다. 마치 진리를 지키면 울타리안에, 지키지 못하면 울타리 밖에 거하는 것과 같다. 창세기는 이러한 구분을 ‘화염검’(火焰劍)의 비유로 표현했다.
그래서 높든 낮든 매 순간 하나님의 눈치를 보면서 사는 것이 옳다. 하나님께 받은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쓸 것이고, 가이사에게 받은 것은 가이사를 위해 쓸 것이니,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황제가 될 기회의 문인 것을 어찌 알았으랴. 몰랐으니 그렇게 한 것이다. 결국 인생은 날마다 진리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하느냐로 점점점 천국으로 혹은 점점점 지옥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살아온 모든 삶이 그 어느날 결국 드러나는 것이다.
점점점 좋아지거나, 혹은 점점점 나빠지거나, 그 운명의 운전대는 자신이 잡고 있다.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신의 위치와 방향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이 해야할 가장 큰 일이다. 빌라도처럼 패망할 것인가? 또는 콘스탄틴 대제처럼 성공할 것인가? 헤롯왕처럼 패망할 것인가? 또는 바울처럼 돌이킬 것인가? 그 마음의 운전대는 본인이 잡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