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마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과 예수님에 대해 나온다. 누가복음에서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하나님이 특별히 준비한 사명자라고 공식 거론한다. 마태복음은 세례요한의 탄생은 나오지 않지만,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세례요한은 그저 그런 사람일 수 있지만, 예수님이 생존했던 그 당시에는 세례요한은 조용기 목사처럼 널리 알려진 인물이고, 예수님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니, 마태는 널리 알려진 세례요한을 앞에 내세우면서 예수님을 증거했던 것이다. 특히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겨냥해서 썼기 때문에 족보장이 맨 앞에 나온다. 지금의 시각으로 생각하면 편집이 엉망이지만, 그 당시에 유대교인들을 대상으로 최고의 작품이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뿌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특히 왕족인지 아닌지 그것이 중요했다. 여기까지가 사람의 시각이다.
성경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추천하고 후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추천하면서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간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사무엘이 무시를 받으니, 심정이 상한 것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면서 사울이 그때부터 능력을 받아서 예언하고 선지자로서 능력을 받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울의 본인 능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처럼 세상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하늘을 올려보면, 마음은 겸허해진다. 나의 경우 특히 그렇다. 나는 항상 “나는 기계설계학과 출신이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나를 국문학과 출신이라고 믿고 그렇게 판단하여도, 나는 애써 기계설계학과 출신이라고 바로 잡는다. 내가 스스로 얻은 집필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력한 것도 있고, 노력 이상으로 내가 얻은 것도 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세례요한처럼 늘 준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다. 과연 하나님께서 4000년동안 준비한 초림역사에 세례요한 1명만 보냈겠는가? 정치적 세례요한으로, 경제적 세례요한으로, 명예적 세례요한으로 수많은 인물을 준비했을 것이다. 동방박사의 경우도 하나님이 특별히 준비한 세례요한이 아닐까? 그렇게 수많은 세례요한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특별한 능력과 선물과 사명을 받았다.
내가 실명(實名)으로 내 삶에 대해, 내 인생에 대해, 신앙에 대해, 내가 보고 겪은 것에 대해 수백권, 수천권의 책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나는 행했고, 내가 받은 능력에 대해 소신껏 감사의 표현을 드렸다. 그래도 부족할 정도로 나는 많은 것을 얻었고, 현재도 누리고 있다. 그래서 더욱 책임이 무겁다.
매일 성경 1장을 깊게 묵상하는 성경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은 마태복음 3장을 읽으면서 세례요한이 자신에게 부여된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고, 결국 예수님과 연결되어서 사용하라고 한 것인데, 그 깊은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그런 오류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왕권통치 시절에는 왕이 백성과 땅을 소유했다고 생각했고, 민주주의 시대에는 백성들이 소유권 제도에 의해 자신들이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할 뿐, 과연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니, 얼마나 허무한가?
나는 곰곰이 생각한다. 고기를 낚는 어부였던 베드로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듯이, 나는 1999년 신문배달을 하던 배달원으로 현재는 신문기사를 쓰는 언론인이 되었다. 내게 일어난 첫 번째 기적이요, 그래서 나는 그 기적에 보답하려고, 내게 하나님이 특별히 허락한 언론인의 직업을 하나님께 쓰임이 되려고, 신앙의 글을 자주 쓰고 있다. 더욱 감사할 것은 내 주변에 이러한 마음을 가진 순수한 신앙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앙세계는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는 것 같다.
수요예배에 갈 시간이다. 준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