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응’이다. 소통은 수수작용이다. 물건을 사고 팔 때는 가격이 서로 맞아야한다. 돈을 가진 사람과 물건을 가진 사람이 서로 주고 받는 것이 거래다. 이처럼 소통은 화자(話者)와 청자(聽者)의 수수작용으로 이뤄진다. 화자는 말을 한 후, 청자가 제대로 듣고 있는지 눈으로 살피고, 귀로 듣는다. 이때, 행동언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음성언어는 어조와 텍스트로 구성되고, 행동언어는 곧 몸짓언어다. 흔히 사람들은 입으로 말하는 것이 전달효과가 크다고 생각하는데, 사람의 인식은 행동언어(몸짓언어)로 판단을 내리는 경향이 짙다. 몸짓언어로 판단한 후, 음성언어는 참조만 한다. 이게 화법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몸짓언어는 이런 것이다. 가령, 친구와 대화를 하는데, 계속 말이 길어진다. 말을 자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상대는 대화에 푹 빠져있다. 이럴 때는 시계를 2번 쳐다보면 된다. 약속이 있다는, 가야한다는 강력한 몸짓 언어로서, 상대는 즉시 말을 멈춘다. 몸짓 언어는 이렇게 강력하다. 스킨쉽도 몸짓언어다. 교회에서 아는 동생의 어깨를 그냥 2번 두들기면서, 친밀하게 인사를 해보라.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상대가 금방 반응한다. 몸짓언어로 말해서 그렇다. 반면, 장의자에 앉았는데, 누가 옆에 앉았다고 하자. 그때 벌떡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남겨진 사람은 떠난 사람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인식한다. 몸짓언어가 이렇게 강력하다. 그래서 나는 장의자에 앉으면 절대로 이동하지 않는다. 괜히 상대에게 오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다.
존경하는 교수님이 만약 단상에서 강연을 한다면, 절대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면 안된다. 또한 등을 의자에 기대고 앉아서도 안된다. 핸드폰을 중간에 들여다보는 시늉을 해서도 안된다. 만약, 누군가 핸드폰이 울렸다면, 결코 움직이면 안된다. 다른 사람 핸드폰에서 벨이 울렸어도, 움직이는 그 순간 교수님은 움직이는 학생이 범인이라고 인식해버린다. 이것이 바로 몸짓언어다. 몸짓은 ‘사진처럼’ 그 발언이 강력하다.
하품을 하면, 그것은 강의가 재미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인식된다. 손을 가려도 똑같다. 하품이 나오면, 그 즉시 일어나서 씻고 오는 것이 낫고, 졸리면 뒤에 서서 강연을 듣는 것이 낫다. 잠이 오지만, 강의를 듣고 싶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교수님께 전달될 것이다. 등을 의자에 기대면 절대 안된다. 교수님은 그 학생을 거만하게 인식하게 된다. 인간의 상식적 심리다. 특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중요한 사람과 마주앉아 대화를 나눌 때는 절대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 안된다. 절대 안된다. 올려놓고서 만지작 해서도 안된다. 그 행위가 녹취한다는 몸짓언어로 인식되어서 그렇다. 녹취는 상대와 신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중요한 클라이언트라면, 핸드폰은 주머니 속에 넣어야한다. 이것이 몸짓언어다.
예전에 다녔던 어떤 교회에서 예배 도중 전화벨이 울렸다. 바로 내 옆사람의 가방속에서 울린 것인데, 그 성도는 손을 슬쩍 움직여서 핸드폰을 껐다. 나는 혹시 내 핸드폰인가싶어서, 핸드폰을 찾으라고 이곳저곳을 뒤적였다. 예배가 끝나고 눈총은 모두 내게 돌아왔다. ‘참외밭에서 신발끈을 매지 말라’는 격언처럼, 핸드폰 벨이 울리는 그 순간 나는 움직이지 말아야 했는데, 움직이면서 내가 의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후로 나는 누군가 핸드폰이 울리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글이 몸짓언어가 될 수도 있다. 피켓의 경우 그렇다. 국제평화축구대회가 개최될 때, 운동장을 한 바퀴 순회하신 정명석 목사님이 마지막 코스에서 한참 서 계셨다. 그곳에 있던 성도들은 다양한 문구를 글로 써서 들고 있었다. 정명석 목사님은 큰 글씨로 써진 문구를 보면서 화답하셨다. 몸짓언어인 것이다. 청중이 모일 때는 피켓의 글씨만 보인다. 깨알처럼 글씨를 쓰는 사람은 보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도화지 크기라면 4자 정도의 글씨가 들어가도록 써야, 확 눈에 들어온다.
인터넷으로 연결되어서 영상통화를 하게 될 경우, 화자와 청중의 입장은 몸짓언어로서 연결된다. 화면과 화면이 서로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설교의 반응을 해야한다면, 청중은 “아멘”이라고 하여도, 그 “아멘”은 인터넷을 통해서 전달되지 않는다. 만약 영상으로만 연결되는 경우, 몸짓언어에 신경써야한다. 몸짓언어는 피켓을 통해 해결하면 된다. 화자의 입장에서 ‘반응’을 어떻게 받아드릴까? 그것을 연구하면 답은 쉽게 나온다. 우선, 양복을 갖춰입고 영상에 비쳐야한다. 양복은 상대를 향한 최고의 예우다. 몸짓언어인 것이다. 그 다음은 “아멘”에 대해, 오른손을 올려서 주먹을 쥐며 결단하는 모습을 보이던지, 혹은 작은 아멘 피켓(스마일)을 만들어서 흔드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상의 구도다. ‘나는 가수다’를 보면, 사람들이 훅, 빠진다. 가수가 노래를 할 때, 순간순간 청중의 눈물흘리는 모습이 비쳐진다. 그 모습은 사실, 편집된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 청중이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다. 편집을 해서 그렇게 보여지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다. 생중계의 경우 영상편집은 불가능하지만, 장면전환을 통해서 ‘아멘효과’를 낼 수도 있다. 아멘 효과는 클로즈엎을 통해 가능하다. 장면전환은 10초 정도가 적당하고, 뉴스화면의 경우 보통 5초, 드라마는 3초마다 전환된다. 전환될 장면은 앵글이 이미 맞춰져 있어야하고, 자유자제로 다룰 수 있어야한다.
국제평화축구대회에서 정명석 목사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볼 배급을 하시면서, 청중과 함께 하시는 그 모습은 화동의 물결이었다. 축구를 하지 않으실 때는 중계방송 아나운서로서 음성이 들렸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몸짓언어인 것이다. 행동은 ‘무언의 천둥’이다. 몸짓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보여질까, 그것을 아는 것이다. 상대의 입장에서 어떻게 느껴질까이다. 가령,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을 최고로 우대하려고, ‘비스트’ 리무진의 뒷좌석 문을 열어줬다.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은 웃으면서 사양했다. 정중한 거절인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 입장에서 비스트 리무진을 타는 것은 상당히 정치적 부담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리무진을 타는 그 행동이 북한에 비쳐질 것을 인지한 후, 미소를 지으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미소를 지으면서 거절한 것도 몸짓언어다.
영상을 통해 본 정명석 목사님의 모든 모습은 항상 양복차림의 넥타이였다. 운동을 하실 때는 운동복, 소나무 전지작업을 하실 때는 작업복을 입으셨다. 말씀을 전하실 때는 언제나 양복차림이었다. 완벽한 몸짓언어로 말씀을 전하시는 그의 삶을 따라, 나도 그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