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信仰)은 지식의 암기가 아니다.
[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근본(根本)은 뿌리 근(根), 뿌리 본(本)의 합성이다. 根은 뿌리의 특성을 나타냈고, 本은 뿌리의 위치를 말한다. 뿌리와 뿌리를 합해서 ‘근본’이다. 순 우리말로 바꾸면 ‘진짜 뿌리’다.
근본을 논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보여지는 것은 존재의 근본이 아니라서 그렇다. 자연만물 중에 나무의 근본은 보이지 않는 뿌리에 있다. 보이는 줄기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뿌리 때문이다. 그처럼 보여지는 현실의 뿌리는 곧 역사에 있다. 역사는 곧 시간의 뿌리다. 우리가 미래를 향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역사’ 덕분이다. 정명석 목사님은 2018.6.20.수 새벽말씀에서 “과거의 약속을 잊지 말라”고 강조했다. 성경에서도 “과거 연대를 잊지 말라, 이집트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또한 정명석 목사님은 “잊으면 죽는다”는 잠언도 말씀했다. 의식있는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만행을 망각하면, 문화적 침략을 당할 것이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모두 역사의 근본 뿌리를 말한다.
어떤 행사든, 어떤 만남이든, 어떤 단체든 목적이 있다. 기업은 ‘이윤추구’가 목적이고, 정당은 ‘정권탈환’이 목적이다. 목적과 근본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주인(主人)이 되지 못한다. 세상 모든 단체의 주인이 될 필요는 없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주인(主人)이 되어야한다.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을 반드시 깨닫고 체휼해야한다. 배우는 지식은 바탕의 땅이고, 그 지식을 통해 근본의 깨달음이 뿌리처럼 성장해야한다.
tvN 드라마 무법 변호사에서 봉상필 변호사는 어린시절 어머니가 “기성의 도시에 절대 오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어느날 배달된 비밀수첩을 통해 ‘기성의 도시’로 부름을 받는다. 그 비밀수첩에는 어머니를 죽인 범인의 사생활이 기록되어 있었다. 기성(綺城)의 도시는 곧 비단성의 도시를 말한다. 서울에 있다가, 누군가 왜 기성의 도시로 불렀을까? 그 근본 이유를 찾으면서 그 드라마는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무대위에 배우가 연기할 때, 캐스팅되는 근본 목적이 있다. 시나리오가 있어서 부름을 받는 것이다. 인생은 대부분 부모의 사랑을 통해 가족의 무대로 부름을 받는다. 태어나지 않은 사랑의 생명은 사랑의 결과로서 부름을 받는다. 그것이 이 땅에 부름을 받은 최초의 사건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그 근본 목적이 있다. 교육부를 통해서 학교를 설립하는 목적은 딱 하나다. 상급학교로 진학이 근본 목적이다. 초등학교는 중학교로, 중학교는 고등학교로, 고등학교는 대학교로, 대학교는 사회로 진출하기 위한 인재양성이 목적이다. 교육의 근본 목적은 사회활동의 인재양성이다. 사회활동의 근본목적은 무엇인가? 여기에 해답을 줄 수 있는 교육전문가는 거의 없다. 이것은 종교적 문제여서 그렇다. 사회활동은 곧 정년퇴임으로 이어지고, 정년퇴임은 행복한 노후생활로 이어지는데, 그 결말은 죽음이다. 사회활동의 졸업은 은퇴이며 노후활동인데, 노후활동의 졸업은 곧 무덤이다. 무덤이 인생의 근본목적일 수 없다. 비석에 적을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 평생을 사는 것은 분명 아니다.
나는 지난 4월부터 지금까지 월명동에 자주 방문하면서, 그의 삶을 보았다. 나의 차원에서, 나의 수준에서 본 그의 삶이다. 다양한 방면에서 그의 삶이 나를 감동시켰는데, 그 중에 하나는 ‘행함에 대한 댓가’이다. 내가 맨 처음 방문했던 4월 25일 자원봉사에서 땀을 흘린 보람은 ‘오렌지와 사과즙’에서 맛이 느껴졌다. 일을 맡기고, 그 일에 대한 수고의 표현을 반드시 하셨다. 연못의 바위섬에 악어 2마리가 설치될 때도 그러하셨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작업에 참여한 3명에게 수박을 보냈다. 비오는 날의 탁구대회와 골프시합에서도 그러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행사에 참여한 선수들과 수고한 자들에게 호떡을 챙기셨다. 정명석 목사님도 크고 작은 일을 사람들에게 맡기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대로 해낸 사람들에게 수고했다고 표현하신 것이리라.
나는 월명동에 자원봉사를 하러 갔을 때, 월명동 나무 책임자가 했던 말이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온 근본 목적은 자원봉사입니다. 각자 맡은 일터에서 벗어나지 마시길 바랍니다. 벗어나서 개인행동을 하는 것은 여기에 온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때, 그 교육이 가슴에 꽂혔다. ‘아!! 내가 오늘 자원봉사로 부름을 받았고, 내가 해야할 일이 있구나!!’라고 인식하고, 오후 즈음에 운동장에서 수요예배가 진행되었지만, 자원봉사의 일터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그날 부름의 근본 목적이 ‘소나무 잔가지 정리’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스파이는 근본 목적을 갖고 적국에 숨어든다. 스파이는 간첩(間諜)을 말한다. 간첩(間諜)은 엿듣는 사명자이다. 간첩은 정보탐색이 근본 목적이다. 간첩이 근본목적을 망각하면, 배신자가 된다. 근본목적은 존재의 이유에 해당된다.
이 땅에 각자가 태어난 1차 목적은 부부의 사랑을 이룸으로 가족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다. 자녀는 1차 탄생의 목적을 부모에게 물어야한다.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생명이 존재하기 전에 존재를 결정한 것은 부모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부모는 그 사랑을 통해 자식을 창조하고, 가족공동체를 형성한다. 대부분 부모가 자식을 낳는 근본목적은 거기에 있다.
그와 같이 섭리에 존재하는 근본목적은 하나님께 물어야한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하나님께 근본목적을 묻는 것이다. 간첩은 숨겨진 첩보원이고, 대사는 드러난 첩보원이다. 간첩도 대사도 모두 적국에 파견된 사명자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섭리인은 모두 하늘편에서 파견된 땅의 대사들이다. 왜 하나님께서 섭리에 불렀을까, 그 근본목적은 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우리를 보냈을까,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입술의 암기신앙을 해서는 안된다. 신앙(信仰)은 암기과목이 아니다.
신학(神學)은 암기과목이 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는 학문이 곧 신학(神學)이다. 반면, 신앙(信仰)은 믿음으로 우러러 보는 것이다. 학문이 아니다. 학문의 지식을 토대로 실제로 살아내는 것이 신앙(信仰)이다. 매순간 조금만 깊게 상고(詳考)하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바라는 근본목적을 알 수 있다.
생각해보라. 오늘 A와 만날 때는 만나는 목적이 있다. 비즈니스 차원에서 만날 수도 있고, 친목을 위해서 만날 수도 있고, 사귀려고 만날 수도 있고, 육체의 사랑이 목적일 수도 있고, 인터뷰를 하려고 만날 수도 있고, 속일 목적으로 만날 수도 있고, 다양한 목적이 존재한다. 목적없이 불려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징그럽게 할 일 없는 사람이다. 달팽이도 두 더듬이로 목적의 방향을 찾으면서 생명을 영위하는데, 하물며 인생이랴!!
사람도 그러한데, 하나님은 각자에게 바라는 것이 없을까?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바라는 근본목적은 곧 ‘사랑’인데, 그것은 이론의 단어가 아니다. 쉽게 말해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이 목적이면, 불꽃이 튄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근본목적이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랑이 날마다 생활속에서 다양하게 찾아온다. 사랑하는 연인이 사랑해서 이곳저곳 다니면서 대화를 나누듯 그렇다.
섭리사에 존재하는 근본목적을 망각하면, 사는 재미가 없다. 섭리사에 부르신 근본 이유는 성경공부를 통한 진리의 말씀을 통해 자세히 나와있다. 그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목적을 실현하는 인생이 되어야할 것이다. 지식의 암기는 학교에서 유용할 뿐, 섭리에서 지식의 암기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다.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영혼은 지식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실제로 행함으로 형성된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날마다 점검하면서, 하루하루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사랑에 응답하면서, 생활속 창조목적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인생에게 시간을 허락하는 근본목적은 분명 ‘새벽기도’가 아닐까?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리라. 작은 실천을 통해 섭리사에 존재하는 그 목적을 실현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모든 단체에 소속된 회원들은 2가지 부류로 나뉜다. 그 단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회원이 된 사람, 개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단체에 소속된 사람이다. 섭리사도 동일하다. 하나님이 불러서 왔으나, 개인의 목적만을 추구하는 부류가 있고, 하나님의 부름을 깨닫고 하나님의 목적을 추구하는 부류가 있다. 개인의 목적을 추구하는 부류는 인본주의자이고, 하나님의 목적을 추구하는 부류는 신본주의자이다.
이것을 기억해야한다. 하나님의 목적이 점점점 망각되면, 곧 자신의 목적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스스로 물어야한다. “나는 하나님의 목적으로 살고 있는가?”라고. 그게 없으면, 자신도 모른채 이미 하나님의 목적에서 배제된다. 우리가 늘 배웠던 말씀을 따라,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속에 들어있다. 반면, 사람의 목적속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실행하시니, 하나님과 관계회복을 통해 하나님의 부름과 그 신령한 약속을 받는 것, 그것이 섭리사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유다.
긴 설명이 복잡하다면, 새벽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시대 사명자를 만나기 위해서, 새벽말씀을 듣기 위해서 새벽에 벌떡 일어나라는 것이다. 미스 코리아와 새벽 모닝 데이트가 있다면, 밤잠을 설쳐서라도 시간을 지킬 것이다. 사랑의 성령님을 만나는 새벽기도회에 어찌 늦으랴!!!
섭리에 존재하는 근본목적 중에서 ‘그날의 목적’은 새벽부터 시작함을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