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혼(魂)의 다른 말은 ‘얼’이다. 정신이며, 핵이다. 오늘 주일예배 제목은 ‘사랑의 혼’이다. 그 어디서 들을 수 없는 언어의 결합이 신비했다. ‘혼’은 영혼(靈魂)에 자주 사용되지만, 혼불 또는 혼령(魂靈) 등에 사용될 때는 약간 무서운 느낌이 있다. 혼은 곧 넋과 같다. 사랑과 혼이 결합해서, ‘사랑의 혼’이 된 오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는 과연 무엇을 해도 ‘하나님 사랑, 성령님 사랑, 성자 사랑, 형제 사랑’의 실천자임을 깨닫는다.
그가 작곡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 어느 작곡가도 창작의 과정을 공개하지 않는데, 그는 설교가 끝나고 다양한 장르의 작곡과 작사를 선보이면서, 성도들에게 ‘모든 예술의 방향성’을 느낌으로 알게 하신다. 판소리를 구성지게 부르시는데 그 내용은 곧 하나님 사랑이며, 경극을 하셔도 그러하고, 뽕짝(트롯트)도 그렇다. 나는 개인적으로 뽕짝으로 찬양을 하시는게 어깨가 덩실덩실 올라간다. 반면, 어린 아이들은 랩이나 가요, 팝송 스타일이 더 어울릴 수도 있다. 개성대로 모두 좋아할 수 있도록 여러 장르로 곡을 편곡할 수 있는 자유도 허락하시며,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원곡의 2차 편집 저작권도 허락하시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고향이 아닌데 정이 들었다”
그가 말했다.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는데, 답이 틀렸다. 답은 ‘성도들의 관점’이었다. “월명동은 여러분에게 고향이 아니죠. 그런데 살다보니 정이 들었죠. 정이 들어야 살 수 있어요” 아!! 얼마나 정감있는 표현인가!! 고향이 아닌 우리들의 마음도 속속 아시는 언변의 배려에 마음은 이미 무장해제다. 시간이 제법 점심시간이 넘어섰으나, 귀 쫑긋 마음 쫑긋 귀 기울여, 이미 월명동에 있는 듯 하다.
순회(巡廻)가 무엇인가? 한바퀴 도는 것이다. 자동차가 없던 조선시대 왕의 순회는 그 행렬도 엄청났고, 기간도 길었고, 상당한 재원이 동원되어야 가능했다. 암행어사를 몰래 보내서 백성을 살펴보는 방법이 동원되기도 했다. 교통편이 열악해서 그렇다. 반면, 자동차가 생기고 교통편이 빨라지면서 순회가 하루만에 가능해졌다. 인터넷이 발전하고, 광속 LAN선이 깔리면서 HD급 화질이 전세계에 생중계로 연결될 정도가 되었다. 음성은 용량이 작지만, 영상은 음성에 비해 수만배 무겁다. 그러한 영상이 HD급으로 동시연결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동시 연결되었으니, 이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하듯, 해변에서 해풍을 통해 말씀을 전하듯 동일한 효과가 된 것이다. 말과 영상이 동시에 전해지니, 전국교회 및 세계 교회 순회가 동시에 실시된 것이다. 따로 국밥은 없다.
사랑에 개념은 그의 설명을 통해 나는 오래전 재정립했다. 보통 사랑은 ‘이성적 사랑’으로 정의된다. 감성적으로 흥분되거나, 논리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마음의 설렘 같은 느낌으로 정의된다. 혹은 아가페적 사랑으로 모든 것을 헌신하고 나누는 드넓은 관용으로 정의된다. 그는 “사랑은 같이 사는 것이다”라고 쉽게 정의한다. 그렇다. 사랑의 어원은 삶이다. 사랑은 곧 사람과 살아감과 삶과 생활과 같은 의미다. 같이 살려면 필수조건이 있다. 바로 ‘좋아함’이다. 좋아함은 곧 ‘호감’(好感)이다. ‘정이 들다’에서 정(精)은 감정이며, 마음이다. 서로 마음이 좋아해야, 점점점 친해지는 것이다. 환경도 그렇고, 신앙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하나님과 사연도 그렇다. 나도 내 기사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좋은데, 하물며 하나님이시랴. 하물며 월명동 그 사람이랴!!! 또 그는 “사랑은 대화다. 사랑은 답을 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사랑하면, 문제해결의 방법을 알려준다.
가령, 아픈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기도해주세요”라고 한다. 그가 만약 “약수를 마시렴”이라고 말씀하시거나, 혹은 어떤 사람을 보내서 “약수를 꼭 챙겨서 드시라고 했어요”라고 하면, 그것이 사랑이고, 기도다. 약수가 기도의 물결인 것이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려고 엘리사를 방문했을 때,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가 마중나와 기도를 해서 낫게 할 줄 알았으나, 심부름꾼을 보내서 “요단강물에 7번 씻으면 낫는다”고 답만 알려줬다. 답을 알려준 것이 바로 기도요, 사랑이다. 기도의 목적은 병의 치료이기 때문이다. 그가 “월명동에 와서 작품을 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삶을 보게 허락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꼭 그의 작품 활동을 보려고 한다. 작품의 완성을 본 것이 이미 그의 작품과정을 본 것과 같다.
종유석 전문가가 월명동을 방문해, 종유석 관점에서 월명동을 평가했던 것 같다. 종유석은 돌중의 극히 일부분이다. 조경도 건축의 일부이다. 건축속에 조경이 있고, 조경속에 돌이 있고, 돌속에 종유석이 있다.
건축-조경-돌-종유석
대통령-장관-구청장-통장
통장이 자신의 철학으로 대통령의 행정을 판단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통장의 범위와 대통령의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처럼 종유석만 가지고 전체를 비판하면 안된다. 이런 경우가 많다. 부분을 전체로 확대하는 오류가 이런 상황에 해당된다. 물론, 작은 사건이 상징이 되어서 전체에 적용되는 경우도 있다. 반면, 부분을 확대로 해석하는 것이 경계될 때도 있다. 월명동은 성전건축의 무대가 자연과 사람의 하늘의 어울어짐이다. 왕(王)은 곧 三과 ㅣ의 합성으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일체를 의미한다. 그와 같이 월명동은 자연과 사람과 하늘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디자인되어 있고, 그 중에 종유석은 오랜세월 석회석이 만들어낸 자연의 작품이며, 역사를 상징한다. 그러나, 종유석위에 사람이 앉을 수 없고, 소나무를 종유석 근처에 심을 수 없다. 종유석은 전체속에 일부인 것이다.
항상 2가지 사고를 가져야한다. ‘개인신앙과 전체신앙’을 가지라는 그의 말씀에 따라, 연역적 사고와 귀납적 사고를 가져야한다. 귀납적 사고는 곧 나무를 보는 사고이며, 개인신앙에 해당되고, 연역적 사고는 곧 숲을 보는 사고이며, 이는 전체신앙에 해당된다. 월명동의 전체를 보는 것은 사실 어렵다. 신앙적 측면, 예술적 측면, 건축적 측면, 풍수지리적 조경측면, 돌조경 측면, 조망권 측면, 활용성 측면 등을 모두 파악해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을 두루 살피면서 월명동을 평가하면, 그 어떤 곳보다 월등하다. 반면, 특정한 일부만 보면서 전체를 판단하면 모순이 발생한다. 가령, 교통편만 고려해서 월명동을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모순인 것이다. 월명동처럼, 사람에 대한 평가도 그러하다.
이번주, 사랑의 혼(魂) 말씀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먼저 인사하면서, 인정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