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새벽말씀 핵심 키워드는 사연(事緣)이다. 사연은 사건(事件)의 연고(緣故)이다. 사건의 개략적 줄거리가 사연(事緣)이다. 정명석 목사님은 월명동에 찾아온 두 사람을 실제로 만나서 사연을 들어보고, 인식관이 완전히 달라진 사연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첫 번째 사연은 반대의 편견을 갖고 월명동에 방문했다가 월명동을 보고,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고, 사람들을 만나보고, 사회에서 말한 것과 전혀 다른 것을 깨닫고서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말하면서 사연을 털어놓은 내용이다. 그 분은 젊은 시절 군대에서 500명씩 전도강연도 하고, 목회사역을 하려고 했던 꿈도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딸을 통해서 꿈을 이뤘다고 고백한 것이다.
두 번째는 보고자, 관리자가 어떤 생명에 대해 잘못 보고해서 선생님이 다른 인식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불러서 만나보니 전혀 문제가 없어서 전화위복(轉禍爲福)으로 전도사 직분을 감당하라고 은혜를 베푼 것이다. 보고자의 틀린 정보를 따르지 않고, 직접 만나서 사연을 들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사연(事緣)은 대화다. 깊은 편견과 오해가 강물처럼 흐를 경우, 강물은 배를 타고 건너듯이 긴 시간의 사연을 들어봐야한다. 오해의 폭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오해와 편견은 두 사람을 강 이편과 저편으로 떨어지게 한다. 그래서 대화를 해야 폭이 점점점 줄어든다. 사연을 듣는 것은 상대의 입장에서 경청하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사연듣기는 화법이론에서 정말로 중요하다. 우리는 날마다 대화를 나누고, 소통한다. 소통하면서 불통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못해서 그렇다. 진정한 대화는 서로 공감하는 대화인데, 인식관의 껍질이 벗겨지는 대화를 할 때 ‘공감효과’가 일어난다.
스피커는 말하는 기계다. 스피커가 왜 혀처럼 생기지 않고, 고막처럼 생겼을까? 마이크는 긴 혀처럼 생겼다. 반면 입처럼 생겨야할 스피커는 귀의 고막처럼 생겼다. 말은 입에서 나와, 귀로 들어간다. 입과 귀는 곧 소리로 연결된다. 그래서 스피커는 고막을 닮은 것이다. 교회나 교실에서 스피커가 올리는 그 순간, 스피커는 고막이므로 우리는 달팽이관속에 위치한다.
‘말함과 들음’은 반드시 시소원리로 진행되어야한다. 마치, 통역과 흡사하다. 통역할 때는 외국인이 1단락을 말하고, 잠시 쉬었다가 통역사가 번역한다. 물론 동시통역도 있지만, 일반적인 통역은 1단락을 말하고, 바로 통역해서 설명한다. 이와 같이 대화는 진행되는 것이다. 너무 길게 사연을 설명하면 상대가 무엇을 공감한지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화자(話者)는 반드시 청자(聽者)가 제대로 듣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함의 마이크를 상대에게 넘겨야한다. 시소처럼 그렇게 해야한다.
지구는 낮과 밤이 계속 교차한다. 그와 같이 대화는 말함과 들음이 계속 반복되면서 지루함이 없게 한다. 한쪽에서 너무 길게 말하면, 대화는 금새 지친다. 말함과 들음의 반복은 정말로 중요하다. 대화의 규칙은 빨간불과 초록불의 반복이다. 내가 어느 정도 말하면, 상대에게 바톤을 넘겨주는 방법을 익혀야한다. 길게 말하면서, “어떻게 생각해요?”라고 물으면서 말을 건네면 된다. 상대에게 말할 기회를 주게 되면, 자신은 청자(聽者)로서 귀를 기울여서 자신의 사연을 상대를 통해서 다시 듣게 되는 놀라운 효과를 보게 된다. 이러한 화법이론은 ‘관찰의 관찰’로서 설명된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수백개의 단체장을 알고 있고, 핵심적으로 수십개의 단체를 자세히 알고 있다. 그 분은 ‘인맥의 여왕’이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방금 이 글을 쓰는 순간 그 분이 카톡을 보내왔다. ‘감사합니다’라고. 그 전에 보낸 칼럼에 대한 답신이지만, 절묘한 타이밍이다.)
그 분이 인맥의 여왕이 되기까지, 방법은 ‘사연듣기’였다. 어떤 단체를 소개받으면 그 단체에 직접 방문해서, 단체장의 사연을 자세히 들으면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진실하게 사람을 사귄 것이다. 그렇게 수십년을 하다보니, 인맥이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서 인맥의 여왕이 되었고, 모든 사람의 장점을 파악해서 서로 어울어지게 하는 달란트까지 얻게 되었다. 사연(事緣)을 듣는 것은 이처럼 사람을 얻게 하는 놀라운 효력을 발휘한다.
때론, 상대의 ‘오해와 편견’을 풀기 위해서 때론 상대의 말을 그냥 들어주는 것, 신문고가 되어서 상대의 호소를 그냥 들어주는 것으로도 오해가 풀릴 수도 있다. 오해와 편견에 설명을 하는 것이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듯 싸움을 키울 수도 있다. 침묵의 물이 오해의 불을 끌 수 있음은 ‘사연을 들어주는 경청의 화법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사연은 인연으로 연결된다. 오해는 형제도 분단한다. 편견은 좋은 사람도 나쁘게 봄으로 ‘비판의 총구’를 겨누게 한다. 사연을 듣고 이해하는 것은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것과 같다. 오해를 하면 서로 멀어져서 남북분단처럼 동상이몽으로 결별한다. 그래서 사연을 들어야한다. 사연을 들으면 서로 연결되고, 서로 알게 되고, 이해의 강물이 흐르게 된다.
무지속의 상극세계에서 요시야와 느고는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깨졌다. 요시야가 만약 느고의 말을 듣고, 직접 가서 만나보고,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회담도 체결하면서, 느고가 꾼 꿈과 살아온 사연을 자세히 들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듣는다는 것, 귀가 2개라는 것, 고막속에 달팽이관이 있어서 소리를 느낀다는 것, 참으로 귀한 인생의 비밀이다. 오늘도 사람의 사연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