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은 솔직성과 진실성으로 옳다고 여겨진다고 믿음으로 장애인에 대한 내가 보고, 겪고, 느낀 생각들을 지면에 표현하고자 한다. 다소 장애인처럼 불편한 어감으로 여겨져도 그저 한 사람의 의견으로 여기는 관용을 베풀어주시길, 좋은 정보를 얻었다면 기꺼이 지면을 허락해준 황정희 이사장에게 감사를 표하면 좋겠다.
장애인이란 말은 어감적으로 ‘불구자’의 뜻이 상당히 강하다.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장애인’도 동일하다고 본다. ‘장애인’이라고 지칭하는 그 순간 그가 어떤 장애를 가졌든, 장애를 극복한 정신이 얼마나 치열하고, 근면하고, 애절하던지 모두 ‘장애인’에 갇힌다. 장애인은 보호받을 불구의 대상이다.
이런 의견에 장애인이나 장애인 단체가 반대할 수도 있다. 여하튼, ‘장애인’이란 말로 인해서, ‘장애인’이란 사회적 신분으로 인해서, 겉으로 보여지기에 장애인으로 판단되면, 누구나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것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장애인중에는 정상인보다 강한 정신력으로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정신은 보편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일반인은 장애의 외형만 쳐다보고, 측은지심을 갖는 것이니, 이것은 사람의 보편적 심리이며, 동방예의지국에서 살아가는 착한 한국인의 심성이다. 나도 여기에 포함된다.
슬픈 일은 이러한 심리를 악용하는 경제적 편취활동과 시민단체가 일부 있어서다. 그러한 활동들이 장애인을 향한 시민들의 마음을 경직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각 장애인들이 요즘 지하철에 드믈다. 옛날에는 하모니카를 불면서 지하철에 지팡이를 짚으면서 바구니를 들고 다니면서 찬송가를 불렀다. 그 누가 지갑을 꺼내지 않을 수 있을까? 지갑을 꺼내지 못하는 시민은 찬송가 울림이 커질수록 죄인이 되었다. 시각 장애인은 바구니에 1만원권이 들어오면 어찌 알고서 얼른 주머니에 따로 챙긴다. 지하철에서 내린 시각 장애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얼른 똑바로 걸어간다. 그러한 거짓 시각장애인 때문에 정작 보호받아야할 시각 장애인들이 의심의 눈총을 받게 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회적 현실이다. 검찰을 사칭하면 공무원 사칭죄로 형사처벌을 받지만, 장애인을 사칭해서 경제적 이익을 편취했을 경우 형사처벌을 할 조항이 미비함에 따라 발생한 사회적 부작용이다.
광화문에 가면, 시청으로 가는 지하도로에 장애인을 보호하는 시민활동이 지속적으로 펼쳐진다. 그곳에 불편한 장애인들을 거의 날마다 동원하면서 시민의 눈총을 사고 있다. 장애인들이 몰려서 지하에 장시간 머문다면 얼마나 몸이 불편할 것인가? 또한 정상인들은 마음이 부담이 되어서 그곳을 지나기도 힘들다. 장애인들을 동원하면 사회적 약자로서 신분을 얻기 때문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간혹 집회의 선봉장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한 모든 활동이 결국 장애인의 보편적 복지정책이 실현되도록 상당한 영향을 미쳤겠지만, 시민들의 시각은 부작용일 수 밖에 없다. 장애인은 장애인답게, 자신에게 주어진 장애물을 이기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일이 급선무다.
나는 마음이 맑은 사람이면, 장애인이든 정상이든 모두 좋다. 마음이 굽으면 악인(惡人)이고, 마음이 양처럼 착하면 선인(善人)이다. 그가 장애를 가졌든, 몸이 정상이든, 마음의 상태가 선과 악을 결정한다.
얼마전이다. 좌측팔이 없는 어떤 학생이 까페에 들어오더니, “안녕하세요. 공부를 하려는데 학비가 조금 부족해서, 양말을 팔려고 직접 나왔어요”라고 했다. 그래서 “양말이 얼마예요? 제가 필요하고, 마음에 들어야 양말을 사죠!!”라고 대답했더니, 그 학생은 가방속에서 양말을 꺼내더니, “제가 직접 시장에서 골랐어요. 그렇게 비싸지 않지만, 사주시면 제게 정말로 도움이 돼요”라면서, 해맑게 웃음지었다. 그렇게 몇컬레 양말을 구입했더니, 고객에게 하듯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는 떠났다. 부탁하는 법도 알고, 고객의 마음도 알고, 거절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한 그 장애인은 정상인보다 더 힘찬 발걸음을 걸었다. 그가 누구인지, 양말을 판 이익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나는 상세한 내역을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팔이 없는 그 장애인은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그가 팔이 없어서 양말을 산 것이 결코 아니다. 양말을 팔기 위해서 마음을 다하는 그 진심이 와 닿아서 몇컬레의 양말을 샀고, 내게 필요한 것도 있었다.
서울의 지하철에 보면, 노약자석과 임산부석이 있다. 항상 나는 그 좌석을 유심히 관찰한다. 과연 서울시민은 피곤의 유혹을 뿌리치고, 항상 그 좌석을 빈 공간으로 구분한다. 임산부같지 않은 여인이 그곳에 앉아 있어도 우리는 ‘임신초기의 임산부’라고 기꺼이 믿는다. 노약자석과 임산부석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교육효과가 상당히 크다. 비어있으면 비어있음으로 우리는 노인들을 향한 공경의 효심을 되새기고, 때로는 일반석에 앉아있는 학생도 어르신들을 위해 기꺼이 자리를 양보한다.
정상인의 한 사람으로서, 과연 장애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그러한 교육 프로그램이 현저하게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을 보면, 정상인은 정상인의 시각에서 장애인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장애인이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장애인들에게 다가갈 방법을 잘 모른다. 가령,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을 타면, 정상인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보면서 무엇을 도와야하나, 먼저 생각하지만, 도울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마치 외국인을 만난 내국인의 입장과 흡사하다. 청각 장애인들이 수화(手話)로 대화를 나누듯, 정상인과 장애인이 함께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서, 평소에 자주 접하는 장애인들과 함께 어울어지는 정상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이 되면 참 좋겠다.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 허리가 굽어서 나도 노약자가 될 것이 분명하므로, 그때가 되기까지 양보와 배려로 선행을 조금씩 저축하면서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