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드라마 칼럼 / 장창훈]=한국판 페이스 오프 ‘나인룸’(tvN)이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심도있는 질문을 던진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를 정의함에 있어서, 얼굴과 의식이 서로 상반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심장이 멈추면 전기자극 요법을 쓰면서 의식을 지배하는 혼령이 뒤바뀐다는 설정이 ‘’나인룸‘의 중요 사항이다. 변호사와 죄수의 혼령이 뒤바뀌면서 의식구조의 개편이 일어난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실제로 발생하면서, 의식까지도 변경된다. 과연 둘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빙의(憑依)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빙의는 자신의 의식이 존재하면서, 다른 혼령이 잠시 전세를 살 듯이 의식을 지배하는 현상인데, ‘나인룸’은 혼령이 서로 뒤바뀐 채로 육체가 바뀐 것이다. 아내가 있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서로 바꾼 것과 같고, 어머니가 바뀐 것과 같다. 혼령이 그렇게 바뀔 수는 없지만, 우리는 상징의 사건으로 그러한 경우를 많이 접한다.
육체를 ‘땅’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일본은 한국의 땅을 뺏고서 ‘일본의 문화와 사상’을 집어 넣었다. 식민사관이다. 한국의 혼이 침탈당하고, 한국은 일본어를 사용해야만 했다. 조선의 땅에서 일본을 찬양하고, 일본의 역사를 배워야했던 식민지 치하가 바로 육체를 뺏긴 것과 흡사하다. 뺏은 자가 있다면 뺏긴 자가 있다. 왜 그러한 현상이 발생했을까? 드라마에서는 무의식 세계에서 전달한 ‘경고음’으로 설명한다.
“무의식의 요란한 초인종을 무시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 을지 해이의 회상
주인공은 장하수와 을지해이다. 둘의 몸이 뒤바뀌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휘말린 것은 풀지 못한 한(恨)이 되물림되어서다. 한국과 일본은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하고,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삭제되면서 영원한 평행선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선조들의 불행한 역사가 그대로 흐르면서 후대에 살고 있는 우리도 일본과 원수가 되었다. 그와 같이 장하수와 을지해이가 운명이 꼬인 것은 위에서 풀지 못한 연결고리 때문이다.
실제 사형언도를 받았던 장하수는 본인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데, 왜 죽인 것으로 되었는지, 왜 사형수가 되었는지, 그 원인을 34년동안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 어느날 을지해이 변호사가 접견을 왔을 때, 그 노트북에서 ‘추영배’를 목격한다. 자신이 죽였다고 되어있는 그 추영배가 여전히 살아있는데, 이름이 다르다. ‘기산’이다. 분명히 추영배인데, 그 추영배는 죽었어야하는데, 기산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다. 그것을 알게 된 장하수는 숨이 멎고, 그 사건으로 을지해이와 장하수가 몸이 뒤바뀌는 특별한 설정에 들어간다. 그렇게 을지해이의 몸을 가지고 탈출에 성공한 장하수, 장하수의 몸을 가지고 감옥에 갇혀버린 을지해이 변호사, 기산을 죽이고서 기산이 되어있는 추영배의 흉악한 얼굴, 그리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채 지금껏 살고 있는 ‘기유진’의 운명, 모두 추영배가 비밀을 알고서 바꿔치기를 한 것이다.
장하수와 을지해이는 똑같이 발생한 ‘뒤바뀜’을 놓고서 해석이 다르다. 갑자기 변호사가 되어서 자유를 만끽하는 장하수는 ‘신의 축복’이라고 하고, 장하수의 몸으로 죄수복을 입게 된 을지 해이는 ‘신의 저주’라고 생각한다. 희생양을 당한다는 것은 이처럼 운명이 엇갈리게 된다. 과연 누군가를 갇히게 하고서 자신은 풀려나는 것이 공의일까? 그럴 수 없다. 유대인인 민란을 잠잠케 하려고,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양으로 삼았으나, 그 희생양이 된 예수 그리스도가 오히려 하나님의 재물이 되어서 신약의 씨앗이 되었다. 추영배도 도둑질을 하고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기산을 희생양으로 삼고서 자신이 기산이 되었다. 그것은 범죄이지, 축복은 아니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누군가의 것을 뺏는 것이 결국은 운명이 뒤바뀌는 늪에 빠질 수도 있다. 야곱의 경우,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형의 옷을 입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한 변장이 혹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여도,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야곱도 결국 집에서 쫓겨나고, 밧단아람에 가서도 삼촌의 속임수에 휘말리게 된다. 짝을 찾는데도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 대신에 레아를 택할 수 밖에 없는 속임수에 빠지게 된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러한 사건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21년을 외가집에서 데릴사위제를 하고서 고향으로 돌아온 야곱이 형 에서와 진정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야곱의 노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던 야곱조차 그러했는데 우리의 인생이랴!!!
본래 죄수였던 장하수는 변호사의 몸이 되자, “나는 을지해이 변호사다”라고 자기 체면을 걸면서 점점점 을지해이 변호사가 되어가는데….. 본질이 바뀔 수 있을까? 그것이 정의롭다면, 추영배가 기산을 희생양으로 삼고서, 기산이 되어서 모든 부귀영화를 차지한 것이 정의롭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불법은 정의가 될 수 없다.
이 드라마가 흥미로운 것은 단지 뒤바뀜의 설정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뒤바뀐 것을 실제로 알게 되는 비밀의 암호를 설정하고서, (비밀의 암호는 추억의 사연으로 설정했다) “믿으려 들면 믿을 이유가 천가지이고, 안 믿으려 들면 세상살이가 모두 사기같고, 의심에 빠진다”는 말처럼, 보이는 얼굴의 겉보다는 내면의 마음으로 본질을 파악해야함을 알려준다. 이 모든 퍼즐은 전체집합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