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언젠가, 어떤 교회에서 설교를 들었다. 30년 동안 내가 알고 있던 내용과 정반대 이야기를 했다. 종교탐방을 통해 나의 인식관이 확장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트루먼 쇼’처럼 나의 고정관념은 율법의 장막처럼 금기의 감옥이었다. 넘고 싶으나 넘을 수 없는 그 한계선은 화염검과 같다. 누가복음 12장 49절, “여기서 불이 무엇입니까?”
불은 곧 말씀이다. 다른 이견이 존재할 수가 없는데, 글쎄 불이 말씀이 아닐 수 있다는 시각에 새롭게 제시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불이 말씀이라고 확증하는 내게 그 설교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맥락이다. 누가복음의 전체 맥락으로 누가를 통해 ‘불’을 거론한 그 맥락을 봐야한다는 것이다. 아멘!!
누가복음 12장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성경은 문학의 속성이 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을 관찰자 시점에서 기록한 전기문이다. 위의 내용은 예수님의 말을 직접 인용했다. ‘불’은 곧 말씀으로 풀이될 수 있는데, 여기서 말씀은 성경해석이 아니다. 이것은 간단한 이치다. 예수님이 말씀한 그 ‘불’이 ‘말씀’이라면, 그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오는 ‘로고스’로서 말씀이다. 즉, 성령의 형상으로서 말씀인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말씀과는 전혀 속성이 다르다. 진리의 말씀과 설교의 말씀이 구분되듯이 불이 곧 말씀이라면, 그 말씀은 하나님과 성령과 함께 존재한 그 말씀인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들었을 때 나의 인식관은 촘촘히 단면이 드러났고, 인식관이 세밀해졌으며,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장막이 걷히고, 커텐이 열리니 너머의 세계가 보였다. 곧, 말씀의 존귀함이다.
맥락으로 풀이하면 불은 말씀으로 제한하기 어렵다. 풀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신앙훈련에 유익하지만, 해석을 해야겠다면 그 불은 곧 심판의 불이다. 뒤에 나오는 성경구절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수능시험을 보는 지능으로 이해하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불은 곧 화재와 같다. 불이 떨어지면 집이 사라진다. 그처럼 불을 던지는 것은 심판이 내리는 것인데, 당시 유대교는 돈과 향락과 정치에 빠져서 하나님을 근본으로 섬기지 못하였다. 유대교의 타락상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다. 화평을 주지 않고 분쟁을 주는 그 ‘불’은 곧 심판이다.
누가복음 3장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의 전체 맥락으로 보면, 예수님은 3장에서 물세례를 받으신다. 이후 12장에서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라고 언급하셨다. 세례(洗禮)는 곧 깨끗케 하는 예배이다. 거룩함은 곧 죄사함이다. 물세례는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이 목회활동을 시작한 것이고, ‘내가 받을 세례’는 아직 남은 세례인데, 죄를 깨끗케 하는 세례는 십자가 사건외에는 없다. 즉, 십자가 고난을 상징하는 표현이며,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희생양이 되어서 심판의 불을 스스로 짊어지신 것이니, 곧 불세례에 해당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상당히 깊은 사도 바울적 해석이다.
누가복음 24장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전체의 맥락으로 해석하면, 누가복음 12장 49절에서 말하는 ‘불’은 곧 ‘불세례’이며, 진노의 불, 심판의 불을 예수님이 스스로 짊어지고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세례’(洗禮)를 고난으로 받으시고 영광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고난을 통한 영광의 길은 기독교의 신비한 좁은 문이다. 어찌 이 깊은 묵시를 부인하랴!!
*** 해당 칼럼은 개인적 성경해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