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경의 복음을 믿는다. 특히, 복음서의 기록을 신뢰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각각 기자정신으로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에 따라 그 당시 역사를 기록했다. 단지, 예루살렘의 멸망 사건을 본 이후에 예수님의 예언을 기록함으로 ‘예언의 성취’를 증거했다. 한국의 기독교는 ‘재림’의 단어에 상당히 민감하다. 김정은이 한국을 방문하는 것처럼, 민감한 단어가 ‘재림’이다. 기독교의 가장 큰 소망이 ‘재림’인데, 그 재림이 부정적인 단어가 된 것은 ‘재림의 교리’가 너무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재림(再臨)은 다시 임한다는 것이고, 臨은 來의 존칭으로, ‘온다’는 것이다. “다시 올께”의 약속이 바로 ‘재림’이다. 예수님이 처음 오신 것, 그것을 초림이라고 하고, 다시 오시는 것을 ‘재림’이라고 한다. 초림주는 처음에 오신 주님, 재림주는 다시 오신 주님이다. 초림주와 재림주가 동일인물인가, 다른인물인가, 이것은 신앙의 근간을 흔들어놓을 정도로 중요하고, 민감한 부분이다. 사도행전 1장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을 적어본다.
◆ 본 그대로 오시리라
사도행전 1장 11절은 출처가 불분명한 인터뷰 기사다. 천사들이 이야기한 것을 누군가 들은 것인데, 그 인물이 누군지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았다. 두 따옴표로 인용했으므로, 천사의 말을 그대로 가져왔다. 천사의 말을 녹취한 것은 없을 것이고, 누군가 들은 것을 신뢰하고서 적은 것이다. “천사의 말은 믿을만한가?” 이런 질문도 제기될 수 있다. 사도행전의 첫 시작점에 나오는 내용인데, 사도바울의 대변자로서 누가가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사도행전인데,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의 마지막 장면을 묘사함에 있어서, 제자들이 공감하고 신뢰하는 마지막 모습이 그러함을 우리는 인정해야한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의 문구는 제자들의 이름으로 출처를 밝혀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장11절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과 같다. ‘본 그대로’의 구체적인 모습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사도행전 1장 11절에 나오는 ‘본 그대로’는 ‘예수의 가심을 본 그대로’와 연결해서 이해를 해야한다. 승천과정을 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한 말이다. 제자들이 제대로 알아들었다고 신뢰한다면, 누가의 기록은 ‘승천한 과정의 모습대로’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맥적 해석에 이의(異意)는 없다. 누가의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초점을 맞춰서 이해하면, 그 뜻은 ‘승천과정으로 다시 임한다’이다.
◆ 누가 오는가?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사도행전 1장 11절을 기준해서 논한다면, 그것은 부활의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다. 이견(異見)이 존재할 수 없다. ‘너희가운데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의 문구가 그것을 증명한다. 현대인은 ‘그 예수’와 직접 만난 적은 없다. 사도바울조차 육체로 임한 그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을 뿐이다.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놓고,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졌음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의 육체를 죽였다. 무덤속에 안치된 예수님의 육체는 그 무슨 까닭인지 증발되었고, 부활의 예수님이 곳곳에서 출현했다. 무덤에 안치된 시체가 살아난 것인지, 혹은 시체는 실종당했는지,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핵심은 부활의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살았을 때 모습과 많이 달랐다. 즉, 물질의 육체가 아니고, 영체로서 예수님인 것이다. 물질로 만져지는 육체였다면 40일이 아니고, 40년동안 함께 했을 것이다. 40일후에 승천하신 것은 영체로서 예수님이어서 그렇다. 하늘로 올려지신 그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을 말하며, 재림하실 때는 부활의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눈을 떠야한다. 승천사건이 발생하고, 곧바로 베드로가 맛디아를 뽑았다. 맛디아를 사도로 임명했는데, 과연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지 않았을까? 부활의 주님이 그 현장에 없었다면, 맛디아를 사도로 임명한 것은 베드로가 된다. 베드로가 주님인가? 아니다. 베드로가 주님이 아닐진대, 부활의 주님이 영적으로 함께 했던 것이다. 육체로 보면, 부활의 주님이 하늘로 올려졌으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부활의 주님은 항상 함께 하시는 것이다. 반대자 사도 바울을 전도했을 때, 부활의 주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행하셨다. 아나니아 선지자에게도 부활의 주님이 함께 행하셨다. 루터때도 부활의 주님은 직접 행하셨다. 지금도 부활의 주님은 함께 행하신다. 재림(再臨)은 항상 있었고, 신약에서 말하는 ‘대심판의 재림’에 대해서는 깊은 설명이 필요하다. 대심판의 재림은 이스라엘이 독립된 1948년이 상징의 기준이다. 사도행전 1장의 예언이 이뤄진 것이므로, 대심판의 재림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이뤄짐을 명심해야한다.
** 해당 칼럼은 개인적 견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