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의 중심에 누가 있는가?
[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신앙세계에서는 사람에게 절대충성하면 끝이 비참하다. 지도자와 따르는 자는 절대로 ‘충성과 섬김’을 강요하면 안된다. 계급주의가 발생하면, 그 순간 마귀가 침입한다. 어쩔 수 없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무릎을 꿇는다면 그곳에는 마귀가 있다. 이집트가 바로 그곳이다. 권력의 우상숭배다.
예수님의 3대 시험에서 마귀가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절을 하라’고 했다. 자신이 마귀가 될 수도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한다. 예수님이 스스로 섬김을 받는 위치가 될 수도 있었다. ‘왕으로서 권력’이 생길 수도 있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12사도, 70문도로 조직이 탄탄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권력으로 세상을 다스리지 않았다. 자신의 친척이 권력청탁을 했을 때에도 ‘권좌의 위치는 하나님의 결정사항’이라고 했다. 권력은 결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다. 권력으로 망한 인물이 다윗이다.
절대충성이 진리라면, 우리아 사건은 범죄가 될 수 없다. 충성자 우리아는 다윗에게 절대충성했고, 알든 모르든 우직하게 적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다윗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고, 아내까지 바쳤다. 과연, 그 충성심은 역사에 기록될만하다. 마태는 ‘우리아의 아내’라고 기록했으니, 그 충성심은 어떤 왕조의 신하보다 독특하다. 그 충성을 받은 다윗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징벌을 내렸던가. 밧세바가 낳은 아들을 죽였고,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이 일어나서 궁녀를 대낮에 겁탈하는 징벌을 내렸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권력은 하나님이 증오하는 미운물건이다. 마귀가 곧 권력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권력으로 지배하는 분이 결코 아니다. 권력으로 지배하여 통치철학을 세뇌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면, 북한의 김일성 주체사상이 곧 하나님의 역사일 수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세계는 곧 북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위치에 앉는 곳이 곧 이집트다. 다윗조차 자신의 권력으로 신하를 마음대로 하고, 신하의 아내를 권력으로 뺏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범죄로 규정했다. 다윗은 갑자기 찾아온 압살롬의 징벌을 받아야했다. 무서운 심판이다. 다윗을 이은 솔로몬은 결국 이방민족과 결혼정책으로 우상숭배가 궁궐 깊숙이 들어왔고, 이스라엘의 야훼신앙이 무너지는 첩경이 되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그 사건이 결국 자식대에 이방민족의 결혼정책으로 확산되고, 남북분열로 이어진 것이다.
절대충성과 권력은 동전의 양면이다. 절대믿음, 절대충성, 과잉충성 등등 사람을 위해서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사상이 지배하는 곳에는 마귀가 있다. 권력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을 뜻한다. 따르는 자의 섬김을 받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처럼 성도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섬김과 예배의 대상이 되므로, 그것이 징벌의 미운 물건이 되는 것이다. 권력의 유혹을 이길 때, 비로소 마귀가 떠나고 천사가 함께 한다. 절대믿음은 오직 하나님을 향해야한다. 그것을 반드시 기억해야한다.
예수님이 “마귀야 떠나라”고 했을 때, “주 하나님을 섬기라”는 그 절대믿음으로 이긴 것이다. 모든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예배의 중심에 목사가 있거나, 다른 무엇이 있을 때, 그 예배는 옳지 못하다. 예배(禮拜)가 곧 경배다. 경배받으실 분은 오직 주 하나님이다. 그 누구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