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포로생활에서 요셉이 있었다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다니엘이 있었다. 요셉은 실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가족이 혜택을 봤다면,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온 민족이어서 이스라엘을 위한 정책은 펼치지 못했다. 요셉은 꿈으로 하나님과 소통했고, 다니엘은 환상과 이상으로 하나님과 소통했다.
다니엘은 기도했다. 포로생활이 언제 끝나는지 그것을 놓고 기도했고,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을 놓고서 기도했다. 이방민족의 패역함, 압제, 잔악함, 극악무도함, 악의 연대기를 놓고 우상제국의 멸망을 기도했던 다니엘이 깨달은 것은 어이없게도 ‘율법의 약속’이었다. 모세가 예언했던 율법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버림으로 버려졌음을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왕을 섬겼고, 돈을 따랐고, 제도를 사랑했고, 권력을 탐했고, 탐욕과 향락과 음탕과 불법과 비리를 주식(主食)으로 삼았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나, 그 마음에는 세상의 것들이 가득했다.
죄악의 본질을 깨달은 다니엘은 통회자복하였다. 이것이 다니엘 9장에 나온다. 구원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자신의 범죄, 죄악을 진실로 깨달음으로, 자신의 현주소를 아는 것이다. 자신이 갇힌 근본을 알아야, 그곳에서 꺼냄을 받게 된다. 갇힌 근본을 알지 못하면 포로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바벨론 포로생활의 본질은 범죄함으로 죄악에 갇힌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바벨론 포로생활이라는 민족의 형벌이 내려진 것이다. 민족이 그것을 알지 못하면 영원히 수레바퀴 인생을 살게 된다. 이집트에서 바벨론으로 바벨론에서 또 다른 곳으로…. 디아스포라 형벌을 받게 된다.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는 것, 그것이 죄악에서 벗어나는 핵심이다.
직장생활에서 과연 월급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바알을 위해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씀했다.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가 하나님을 통해서 나온 것을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목사와 하나님은 독립적 존재체이다. 영과 혼과 육이 각각 독립체이듯, 사역자와 근본자는 각각 독립체이다. 목사가 높은가? 하나님이 높은가? 예수님이 높은가? 하나님이 높은가?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다. 하나님이 분명 더 높고, 경배의 근본자이시다. 이것은 절대불변의 진리이며, 이 진리가 무너지면 그것이 우상숭배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님인 것을 진정 고백할 수 있어야한다.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이 높게 되면, 그것이 우상이다. 하나님은 곧 말씀으로 나타나므로, 성경말씀이 최우선되어야한다.
제사를 지내는 것과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 사진을 보면서 추억하는 것,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인사하는 것, 모두 존경의 표현이다. 절을 하는 것은 무릎까지 꿇는 것이고, 인사는 90도 인사가 있고 목례가 있고, 눈만 깜박이는 것이 있다. 절하는 것이 각각 굽힘의 정도에 따라 우상숭배의 죄가 달라지는가?
인사하는 것이나 절하는 것의 형식 자체가 범죄가 아니다. 마음의 중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다니엘서 9장은 그것을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다니엘은 우상숭배 자체를 철저히 반대하면서 본인의 신조를 지켰다. 마음의 중심을 오늘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나는 내 위치를 파악하며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