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은 같은 페이지의 반복이다. 단지 장소만 다르다. 오전은 이디야 커피, 오후는 톰앤톰스, 저녁은 스타벅스, 점심은 중국집, 저녁은 설렁탕, 커피점은 4~5개를 놓고서 순환하고, 점심은 10곳 정도에서 돌아다닌다.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다. 주일예배와 수요예배와 새벽기도는 꼭 실행하려고 몸부림친다.
똑같은 일상에도 내가 견디는 것은 ‘성경말씀’ 덕분이다. 성경말씀이 내 삶의 소금이요, 길잡이요, 향초다. 무엇을 하더라도, 나는 결국 성경의 종착역에 멈춘다. 성경말씀을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었다. 10년 넘게 그렇게 살다보니 그런 것 같다. 다른 책도 좋아하지만, 결국 성경을 찬찬히 보면서 내 삶을 반성한다.
인생앞에 주어진 가혹한 형벌은 메시야를 분별하는 두려움이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우리는 고백하지만, 그것은 지식이다. 예수님은 교리해석으로 나타나지 않으셨다. 교리해석으로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면, 그 제자들도 교리해석으로 살다가 말로만 십자가를 졌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스데반과 사도 바울 등등 모든 사도들이 순교의 피로서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 행위로서 입증하셨듯 그러했다. 행위의 언어로서 하나님을 표현하신 그의 위대한 삶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던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30년전에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 ‘섭리사’에 왔었다. 20년전에도 나는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신앙의 부활을 이뤘다. 10년전에는 이혼의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성경을 통해서 인고의 삶을 감내했다. 올해 2월에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다. 예수님께 간구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배제되었으니, 성자께 간구했다. 그리고, 나는 소속을 옮겼다. “부활의 예수님은 지금도 구원주인가? 혹은 구원이 필요하신 영혼이신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봉착했다. 일반 기독교인들은 이런 질문이 ‘참람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단적 교회에 푹 빠진 사람들에겐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지금 현재 예수님은 어떠하신가? 부활의 주님은 영원성을 가지신가? 더 이상 구원이 필요없으신가? 사도 바울이 예언한 ‘휴거의 강림 예언’에서 부활의 예수님도 대상체인가? 이러한 질문에 명백한 정답이 필요한 것은 이단적 교회에서는 부활의 예수님이 사명기간 종료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마치 대통령의 단임제 임기처럼, 재림후 중임 불가로 설명된다. 부활의 주님은 임기가 영원한가? 아니면, 2천년인가? 명확한 답이 무엇일까?
T종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이유가 결혼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각 종교마다 제각각이다. 어떤 종교는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다시 온다고 설명한다. 왜 다시 오시나? 성경적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며, 사람만 교체되면서 2천년동안 출현한 각종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는 끊이질 않는가? 나는 오늘 두려움과 떨림으로 부활의 예수님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과연 들으셨으면, 그 답이 내게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