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우리는 간혹 북한이나 이단을 생각하면서,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이 또한 맹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구원은 자본주의를 통해서 일어나지도 않고, 공산주의라고 해서 구원에 불리한 것도 아니다. 공산주의가 구원에 치명적 위험요소를 갖는다면, 중세사회나 로마시대에 구원받는 숫자가 없어야하는데, 순교의 피흘림은 그 당시에 가장 많았다. 자본주의가 편만히 흐르는 영국이나 프랑스는 어떠한가?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교회가 룸살롱으로 넘어가 버렸다. 자본주의가 신본주의에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 대한민국에 과연 주예수를 진정한 왕으로 모시고 섬기는 숫자가 몇이나 될까? 북한의 순교자들보다 많다고 할 수 있을까? 북한은 정치권력에 대한 시험문제가 가장 어렵고, 대한민국은 금권(돈의 권력)에 대한 시험문제가 가장 어렵고, 이단이나 일반 기독교는 종교권력에 대한 시험문제가 가장 어렵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시험문제 3개는 모두 합격해야 구원의 면류관을 받는다. 100점 만점을 받아야한다.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경제문제가 사실상 어렵다. 종교인은 종교권력이 정말로 어렵다. 북한이나 중국은 정치권력의 우상문제가 가장 어렵다. 유럽의 경우 이성의 향락문제가 가장 어렵다. 시험의 난이도는 각각 다르고, 평등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지구촌 모든 곳에서 구원을 이루는 문제는 좁은문에 들어가는 것과 같고, 어떤 환경에 있든지 스스로 신본주의로 살아가느냐가 관건이지, 이단에 빠졌거나, 북한에 태어났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한때 나는 이단에 빠졌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게 구원이 삭제되었다고 사람이 판단할 수 없다. 북한에 있다고 해서, 100% 김일성과 김정일과 김정은의 우상숭배에 가담했다고 할 수 없듯이 그렇다. 자본주의 우상이나 정치권력 우상이나 종교권력 우상이나 모두 동일하다. 무신론도 자기우상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이고, 지식인은 지식권력의 우상숭배자다. 루터 시대에는 교황이 용의 짐승이었다. 역사가 증명한다. 결국, 자신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자가 가장 복된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좁은 문이다.
내가 하나님께 진정 감사할 것은 성경을 통한 구원의 방향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남은 것은 구원의 좁은문으로 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 길이 어찌 쉽겠는가? 저주의 주술신앙을 나는 경멸하는데, 예수님은 저주의 십자가 위에서 구원의 문을 여시고 사랑의 왕이 되셨으니, 사람으로 이해하기 힘든 구원의 오묘한 섭리다. 그저, 내게 있는 작은 헤롯들을 죽이며 살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