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30년 있었던 곳에서 ‘함의 믿음조건을 아브람이 세워서, 아브라함이 되었다’고 배웠다. 본래, 원리강론에 있던 내용으로 확인된다. 이런 성경해석이 대표적인 ‘자기주관적 성경해석’이다. ‘함’이 비슷하니까, 하나님께서 ‘함’을 아브람에게 줬다는 식이다.
영어에 freedom is not free라는 말이 있다. 번역하면,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이다. 영어를 번역했지만, 영어원문의 깊은 의미와는 많이 다르다. 언어가 이와 같다. 함, 아브람, 아브라함의 이름만을 비교해서, 하나님께서 ‘함’ 때문에 ‘아브라함’으로 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인지해야한다.
아브람이 만약 ‘함’의 조건을 세웠다면, 아브함이 되어야지, 왜 아브라함이 되는가? 내 이름이 장창훈이다. 만약, 누군가의 조건을 대신 세운다고 하자. 그 사람의 끝자가 ‘호’라고 하자. 그러면, 내 이름은 장창호가 될 것이다. 아브람은 아브+람이다. 그러므로 아브+함이 합쳐져야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합쳐졌다. 노아의 아들 이름이 ‘라함’인가?
함한테 분노가 치밀은 것은 노아였지, 하나님이 아니다. 노아가 와인을 실컷 마시고, 벌거벗은채 ‘어떤 일’을 하다가 적발된 것이 화근이고, 함은 그 사실을 함구하지 않고 발설한 것이다. 노아와 함이 겪은 부자관계의 마찰에 불과하다.
‘절대믿음 조건’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잘못된 성경해석이다. 아브람은 이삭을 바침으로 순종으로 하나님께 ‘절대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함은 술에 취한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폭로한 것인데, 그게 어찌 ‘절대믿음’으로 분류될 수 있는가? 노아와 함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이고,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신앙의 관계이다. 서로 연결될 수가 없다. 그런데, 함의 믿음조건으로 성경을 해석할 경우, 교주에 대한 과잉충성의 교리가 파생될 수 있다.
함의 믿음조건을 아브람이 세워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됐다고 하면, 노아보다 함의 위치가 크다는 결론이 나온다. 함이 만약 노아의 문제점을 묵인했다면, 그것으로 ‘믿음의 조상’ 반열에 올랐다는 것인가? 아버지의 문제점을 침묵하는 것이 아브라함과 동급의 절대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절대믿음은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 해야한다. 사람을 절대 믿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조차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앞에서 도망쳤다. 절대믿음을 지키지 못했지만, 주님은 용서와 관용으로 기회를 주셨다. 절대믿음을 지키지 못했다면서 노아처럼 저주를 하지 않았다. 그 누구라도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지적해야한다. 사람을 절대 믿으면, ‘보이스 피싱’ 당할 위험이 많다. 하와가 뱀의 말을 절대로 믿었다가 당했고, 아담도 아내 하와의 말을 절대로 믿었다가 직장에서 해고됐다.
절대믿음은 오직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노아가 과연 자식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였는가? 테스트가 있었다면 노아에게 있었을 것이다. 노아 시대에는 노아가 기준자인데, 왜 함이 갑자기 주인공인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자식까지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된 것이다. 자식까지 바친 아브라함의 절대믿음과 아버지의 술버릇을 폭로한 것과 비교하는 것이 황당무개할 뿐이다. 히브리어를 한국어처럼 해석하면서 빚어진 촌극이다.
함과 아브람과 아브라함을 한자어로 보면 전혀 다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含(함)
亞伯蘭(아브람)
亞伯拉罕(아브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