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숭배(偶像崇拜)는 말만 들어도 섬뜻하다. 신사참배(神社參拜) 성묘(省墓) 제사(祭祀) 불상앞에서 절하는 풍습 등등 모두 우상숭배라고 한다. 우상숭배는 곧 우상을 숭배하는 것인데, 왜 예수님의 동상앞에서 기도하거나, 묵념하거나, 무릎꿇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닐까? ‘예수님 동상 숭배’는 왜 우상숭배가 아닐까? 우상숭배인가? 십자가는 우상인가, 아닌가?
종교역사에서 실제 ‘예수님의 동상’을 놓고서, 치열한 종교전쟁을 벌였고, 실제 역사적 예수의 정체성을 놓고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는 정반대 노선을 갔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모세와 예수의 사명을 놓고도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외에 그 어떤 우상을 두지 말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형상’은 거기에 해당될까?
우상은 배우자 개념이다. 우(偶)는 짝 우(偶)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 남편이 누구냐?”고 물었던 예수님 말씀처럼, 인생의 남편은 누구인가? 진정한 남편이 바로 우상이다. 남녀가 결혼하면 서로를 배우자(配偶者)라고 한다. 짝궁 배(配) 짝궁 우(偶)다. 아담에게 돕는 배필(配匹)을 준 것이 바로 하와이다. 그런데, 아담은 하와의 말에 속아서 직장을 잃었다. 선악과 사건이 그것이다. 아담은 배우자 말을 듣고 행한 것인데 왜 처벌을 받았을까? 아담이 먼저 선악과를 따먹고, 그것을 하와에게 권했으면 그것은 타락이 아니었을까?
우상(偶像)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다. 차단된 벽과 같다. 하나님이 집이라고 하자. 그 중에 문이 있다. 문은 우상이 아니고, 나머지 벽은 우상이다. 우상은 하나님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뜻한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느브갓네살 황제가 황금신상의 우상을 세웠다. 대표적인 ‘동상의 우상’이다. 황금신상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 황금신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가? 느낄 수 없으므로, 그것은 우상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행하셨다. 그 당시 정경은 ‘구약’이다. 우리는 간혹 그것을 망각한다. 예수님께는 신약이 없었다. 예수님은 오직 구약이 성경이다. 그 구약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입증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행하시고, 어린양이 되어서 그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서 고난의 십자가를 친히 담당하셧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곧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보여주셧던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상이 아닌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서 그렇다.
우상의 개념은 매우 상대적이다. “A는 우상이다”라고 누가 정의할 수 있을까? 결코 단정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 자체에 신성’을 부여하고, 십자가만을 숭상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다. 이런 사람들은 그 십자가가 어디로 사라지면, 기겁을 한다. 혹은 하나님의 징벌이 떨어질 것으로 착각한다. 십자가는 하나의 상징매체이다. 본질은 하나님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연결하는 중간 매개체이지, 본질은 아니다. 이것인 미디어, 중간자, 중보자 개념이다. 예수님은 인생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신실한 중보자이고, 하늘과 땅을 중보하는 DUO와 같다.
중매(仲媒)는 부동산 중개인(不動産 仲介人)과 같다. 중매는 곧 중개다. 복덕방(福德房)은 중개사무로서 파는 자와 사는 자를 연결한다. 양쪽의 서류를 꼼꼼히 챙겨서 계약을 성립시키는 것이 바로 중개인이다. 예수님은 인생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신실한 중개인이시다. 그런데, 파는 사람을 대신해서 이중 계약을 하거나, 돈을 착복하면 그것은 사기(詐欺)다. 중매장이가 양쪽을 중매해서 결혼을 성사시켜야하는데, 신부가 아름다우니까 중매장이가 직접 신랑이 될 경우, 이것이 적그리스도이다. 아멘!!
우리가 예수님을 신뢰하는 근본은 그가 당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아서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인생들을 하나님께 연결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