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장]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31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한 개인부터 시작한다. ‘빛이 있으라’고 하시니, 그 말씀에 따라서 빛이 생겼다. 창조는 그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밭에 떨어지면서, 그 말씀의 씨앗에서 창조가 서서히 시작한다. 마태복음 13장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20년전 내가 배웠던 신앙의 기초문법이다. 훗날 알고보니, 이 개념이 ‘보수주의’(保守主義)였다. 보수는 제도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틀은 유지하고, 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사람의 교체가 아니고, 사람의 정신변화다. 그래서 보수주의는 사람의 교육에 집중하면서, 사람을 중심해서 사회를 변화시킨다. 진보주의(進步主義)는 ‘앞으로 걸어서 나간다’는 뜻으로, 제도의 대개혁이다. 사람이 제도를 무너뜨린다. 재건축된 제도를 사람이 장악한다. 결국, 진보는 사람의 교체로 이뤄진다. 사람정신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다. 무조건 제도를 부수고, 다시 세우고, 허물고, 다시 만들어야 진보는 존재한다. 사람의 가치는 제도를 위한 부품일 뿐이다. 천국건설은 보수주의에 기초한다.
천국제도와 보수주의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씨앗’에 있다. 천국의 시작은 ‘씨’(氏)에서 출발한다. 씨가 떨어지면서, 그 씨를 통해서 천국이 시작하는데, 보수주의는 이것을 부정한다. 천국에 비교하면, 보수주의가 상대적 진보주의다. 개인을 변화시키면, 개인의 인격과 인성을 변화시키면, 사회가 바뀐다고 생각하므로, 보수주의는 도덕과 율례와 준법과 효도와 선행과 기부를 강조한다. 과연, 그러한 율례를 통해서 내면이 완성될까? 맹자와 공자의 덕치주의는 보수주의다. 보수주의는 ‘밭’과 같다. 아무리 보수주의가 인격을 함양하고, 도덕의 가치를 높이고, 선행의 공덕을 쌓아도, 그것은 옥토밭일 뿐이다. 천국은 그 옥토밭에 씨(氏)가 떨어져야한다. 그 씨앗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은혜다.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혹은 생활속에서 자연계시를 받으면서, 혹은 정치사건을 통한 깊은 신의 계시를 받게 되면, 그 계시가 자신의 혁명을 촉구하지 않으면, 옥토밭에 떨어지지 못한 씨앗과 같다. 설교말씀이 명강의였어도, 그 설교가 지식의 현란함으로 종결지어지면, 밭에 떨어지지 못한 씨앗에 불과하다. 씨앗은 사람의 마음밭에 뿌려져야한다. 사람이 그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스스로 받아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거부했다.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그와 같이, 설교말씀이나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말씀에 대해 “이 말씀을 읽으니, 정치인 누구 누구가 생각난다. 연예인이 생각난다. 교회 누구누구가 생각난다. 목사가 생각난다. 옛날 누구 누구에게 해당된다”라고 하는 순간, 말씀은 길가에 떨어진 것이다. 이러한 비판으로 성경은 인문학 도서로 전락한다. 슬픈 비극이다. 성경말씀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과 같다. 구원의 십자가이지만, 패잔병처럼 모두 흩어진 것을 볼 때, 그 십자가가 어찌 하나님의 뜻이랴!! 하나님께서 총사령관이 되셔서 4천년을 계획한 그 작전이 3년만에 끝났다면, 그것은 작전이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조차 선악과를 따먹기 전까지는 계속 머물렀는데, 예수님은 의인으로서 시대 죄를 대신하려고, 너무 빠른 시기에 십자가를 져야했으니, 계획에 없던 돌발변수임에 틀림없다. 모두 성공했으면, 다시 오신다고 할 리 만무하다. 십자가는 구원의 증표이지만, 부분적 실패는 인정해야한다.
“이것, 해보렴”이라고 말할 때, 나는 “예”라고 대답하고 했다. 그 말씀에 순종하므로, 나는 점점점 겨자씨가 자라듯 성장했다. 앞으로도 내 삶속에서 그렇게 살아가리라. “이것, 해보렴”이라고 말할 때, 나는 “예”라고 대답하고 했다. 그 말씀에 순종하므로, 나는 점점점 겨자씨가 자라듯 성장했다. 앞으로도 내 삶속에서 그렇게 살아가리라. 내 삶, 내 맘, 내 글 좋아해주는 사람들과 마음 나누며 신실하게 살아가리라. 비판의 가시 면류관은 너무 끔찍하므로, 내가 나를 견책하며 나를 가꾸며, 그렇게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