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는 안촌홀(安寸忽)로 기록된 안시성(安市城)은 한자어 그대로 ‘안씨의 마을’이다. 安은 여자가 왕관을 쓴 모습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국에 국빈 자격으로 방문했을 때, 안동(安東)을 방문한 것도 ‘安’을 여왕으로 풀이해서 안동에 갔다는 후문도 있다. 安은 본래 뜻은 안주인이다. 종교 지도자를 의미하며, 모계사회의 흔적이다. 종교와 정치는 본래 속성이 같다. 종교는 신의 말씀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고, 정치는 법률과 제도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영화 안시성에서 가장 감동깊었던 명장면은 ‘양만춘의 정체성’이었다. “내 사전에 굴복은 없다”고 선언한 그는 오로지 고구려를 향해서만 굴복했다. AD 660년 즈음 인물인데, 얼마나 위대한 사상을 가졌는가!! 그 시대는 마호멧이 일어날 즈음이니, 중세는 권력의 무덤속에서 쿨쿨 잠자던 때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카타콤과 로마권력이 모두 동일한 무덤일 뿐이다. 카타콤은 경제적 빈곤의 무덤이고, 궁궐은 권력의 무덤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지켜지는 것이 신앙인의 책무다.
양만춘은 연개소문에게 무릎꿇지 않았다. 그래서 배신자로 낙인찍혔고, 안시성은 ‘사마리아인처럼’ 푸대접과 멸시와 배제를 당했다. 그런데, 당나라 이세민이 침략했을 때 모든 성이 함락되었으나, 평양성마다 함락되기 일보직전인데, 오로지 안시성만 함락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연개소문은 안시성 성주 ‘양만춘’을 배신자로 지목하면서 암살명령을 내린다. 과연 충성의 대상이 누구인가? 성주 양만춘은 성을 지키는 위치에 깃발처럼 목숨을 바쳤고, 백성을 섬겼고, 고구려를 섬겼다.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할 사상의 향기를 보여준다. 우리가 섬겨야할 진정한 군주는 누구인가? 또한 보이는 사람속에서 섬김의 대상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서 사랑해야할 이웃을 은유적으로 알려주셨다.
배신자로 지목된 양만춘이 당나라 침략을 막아냈다.
이단자로 지목된 루터가 교황청의 부패를 막아냈다.
바알세불로 지목된 예수님이 인생을 멸망에서 구원했다.
우리가 비판의 내던짐으로 버린 그 무엇이 각자 인생의 모퉁이돌이 될 수도 있으니, 그것을 어찌 알랴!! 예수님이 진정 예루살렘 성전의 주춧돌이어서, 거기서 빠지므로 성전이 무너졌던 것이다. 중심돌이 빠지면 모든 건축물은 허물어진다. ‘비판의 내던짐’은 항상 경계함으로 모두를 포용하는 사랑을 가져야한다. 예수님은 성만찬식에 배신자 유다에게도 초대장을 보냈다. 유다의 발도 씻겼다. 우리는 그 사랑을 본받아야한다. 배신자라고, 태만한 자라고, 무능력한 자라고, 각종 성적표로 사람을 평가해서 평가절하를 시작하면, 그 성적표가 결국 ‘비판한 당사자의 성적표’가 된다. 비판하면 그 비판의 칼날이 자신을 겨누고, 섬김의 사랑을 다하면, 그 사랑이 자신에게 돌아온다. 나는 안시성 영화에서 배신자 양만춘이 고구려를 구한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교회 성직자는 ‘교회의 단상과 행정’을 ‘양만춘 성주가 안시성을 지키듯’ 그렇게 책임지고 지켜야한다. 또한 성도는 각자의 삶을 안시성처럼 지키고, 가족 공동체를 그렇게 지켜야한다. 십자가의 깃발을 높게 들고, 책임의 사명을 떠나지 않고서, 밀려오는 적과 싸워야한다. ‘적’(敵)이 누구인가? 마귀다.
기독교인이 자주 혼동하는 것이 AD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모든 카타콤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너무 안일한 생각이다.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전략전술이라고 있다. 전략은 바뀌지 않는 것이고, 전술은 전략속에서 자주 바뀌는 것이다. 마귀는 전술을 자주 바꾸면서 신앙인을 공략한다. 마귀가 예수님께 권력과 영광을 줄테니 ‘절을 하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거부하자, 마귀는 권력자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겁박하면서 그 신앙을 굴복시키려고 했다. 마귀는 이렇게 야비하다.
기독교가 지하교회에서 지상교회로 올라옴으로, 로마 정부의 지원을 받음으로, 천국이 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바로, 권력의 유혹이다. 교황들은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권력의 시녀가 되어서 결국 마귀의 꼭두각시로 십자군 전쟁을 하고, 면죄부를 팔아서 성전건축을 하면서 백성의 고혈을 빨았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가단하든 부유하든, 명예롭든 평범하든, 지혜롭든 어리석든, 착하든 나쁘든,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그 마음을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흉계(凶計)를 항상 경계하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아야한다. 이것이 안시성 전투를 통해 받은 신앙적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