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목회활동은 대충 보면, 함께 밥을 먹다가, 반대자를 보면 엄청나게 비판하다가, 다시 잔치를 하다가, 반대자를 보면 ‘저주와 비난’을 퍼붓다가, 다시 잔치를 하다가….. 계속 이런 패턴이 반복된다.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주일에도 쉬지 않고 말씀을 외쳤다. 특히, 밥먹으면서 밥상머리 교육을 하셨다. 아~~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한국적이다.
누가복음 14장 1절~24절은 어떤 바리새인 지도자의 식사 초대 사건이다. 이 바리새인 지도자는 그래도 예수님의 인품과 학식과 권위를 나름대로 인정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누가복음 11장 37절 바리새인의 식사때와는 사뭇 다른 어조로 ‘계급타파’를 비유로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교육의 소재를 ‘현실성’에서 자주 찾으셨다. 안식일이니까, 안식일과 관련해서 말씀하시고, 잔치집이니까 잔치집 비유를 하신다. 눈에 펼쳐진 생활이 곧 단어요, 문장이요, 말씀이요, 성경이신 분이다.
식사를 초대하면, 초대한 주인장에게 예법을 차리는 것이 급선무인데, 예수님은 ‘진정한 예법’을 알려주신다. 곧, ‘진실한 잔치’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초대하는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은 그들이 불편한 그것을 건드신다. ‘심기를 불편케 하듯’,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듯’,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전통율법에 대해 정면 비판한다.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은 율법으로 금해진 ‘범죄’인데, 그것을 보란 듯이 행하신다. 수종병(水腫病) 환자를 고치심으로, 잔치를 주관한 그 바리새인의 아픈 심령과 모인 손님들의 잘못된 사상의 병을 고치신 것이다.
이사야서 11장에 예언된 이상세계를 이루시려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 공동체를 날마다 교육했는데, ‘계급타파의 현실적 실천과제’로서 ‘낮아지는 권력’을 말씀하셨다. 바리새인 잔치집에 가서도, 그들의 세계까지 관여하시는 주님의 성품을 보면, 솔직함과 진솔함이 많이 느껴진다. 높은 자리를 권하는 것, 그것은 주인의 자유다. 그런데, 손님들이 주인에게 높은 자리를 요청한다. 주인과 손님의 서로 다른 갈등구조를 놓고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쉽게 설명하고 있다. “낮아지라, 그러면 높이시리라”는 것이다.
‘말석에 앉으면 상석에 앉히신다’는 그 비유는 피라미드 권력을 좋아하는 현대인에게 경종을 울린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대접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지도자는 상석, 평신도는 말석인 교회는 천국에서 구조가 바뀔 수도 있다. 교회는 혼인잔치의 시작점이라서 그렇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100년은 영원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순간에 불과하다. 무엇을 하던지, 말석에 앉은 듯, 구석에 밀려난 듯, 불청객처럼, 이방인처럼, 불편한 존재처럼 살아갈지라도, 하나님과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시면 말석이 좀 더 나은 곳으로 바뀔 수 있다. 이것이 희망이다.
피라미드 권력을 없애려고 혼신을 다했던 예수님의 삶이다. 가장 많이 신경쓰신 부분이 이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신의 시작점도 그래서 가장 낮은 말(馬) 밥통에서 태어나셨으니, 동물의 존재로 취급받는 천민의 계급에서 백성으로, 제사장으로, 종교 지도자로 추앙받게 되던 30세~33세 목회사역은 자수성가하신 목회자셨다. 그리고, 33세에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죄인으로 생을 마감했으니, 피라미드 권력을 없애려고 스스로 밀알이 되신 교육열(敎育熱)을 느끼게 된다. 자나깨나, 밥을 먹을 때도 주님은 “낮은 자리로”를 외치셨다. 그래야 모두가 높아지므로…..
장로(長老)가 된다는 것은 장관(長官)이 되듯 높은 영예와 관직을 얻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으로 보면, 장로는 가장 낮은 자세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고, 교회 바닥이 되는 분으로 임직되어야한다. 그래야 장로의 본분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30년 있었던 곳은 장로단이 별로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 장로라는 타이틀만 있었지, 세상의 권력과 흡사했다. 누구 하나 교회에서 예수님처럼 낮은 자로서, 멸시의 대상으로서, 천대의 위치로서 낮아지려고 하지 않았다. 장로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다. 멸시와 천대의 위치다. 예수님이 추구하는 권력구조에서 그렇다.
예수님이 진리의 성령을 통해서 하시는 많은 일에서 주된 일이 이것이다. 이상세계 실현이다. 이사야가 왜 동물비유를 들었겠는가? 동물들과 다른 사람의 권력구조를 말한 것이다. 사람도 똑같은 동물(動物)이다. 동물이라서 동물처럼 산다면, 인자(人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한다. 짐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짐승은 짐승의 사회를 이루고, 그들의 권력으로 계속 왕이 바뀌면서 살아간다. 믿는 자는 그러한 짐승의 사회를 이루면 안된다. 짐승세계는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짐승의 권력이 있는 곳은 전쟁이 멈추지 않는다. 진정한 평화는 인자의 권력으로 가능하다. 바로, 잔치에 초대받으면 말석에 앉는 것부터 가능하다. 대접받기보다 대접하는 것, 서로 인사하는 것, 서로 알아주는 것, 그것부터 평화가 시작하는 것이다. 분노와 비판과 의심과 배척과 지배와 압제의 핵무기는 내 마음에서 제일 먼저 폐기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