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1장에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사건이 나온다. 당시 성전세는 반세겔이다. 한세겔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으로 10만원 정도다. 한 렙돈은 1/64 세겔이므로, 두 렙돈은 1/32 세겔에 해당된다. 계산해보면, 대략 2000~3000원 정도다. 힌끼 식사비였다. 예수님은 ‘생활비 전체’라고 평가했다. 먹고 살 돈도 없는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체를 헌금통에 넣었다고 하니, 어떤 심정이었을까?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만찬이 생각난다. 5천명을 먹인 오병이어 도시락도 생각난다.
헌금(獻金)을 논하면, 아브라함을 거론해야한다.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를 말함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남으로 자신의 청춘을 하나님께 바쳤다. ①고향 ②아버지 ③아내 ④롯 ⑤아들까지 차례로 하나님께 바치면서 자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이 되게 했다. 헌금(獻金)에서 헌(獻)은 ‘가마솥에 푹 삶는 개고기’를 뜻한다. 개(犬)는 제사음식으로 최고품이다. 伏은 충성보다는 ‘희생의 개’로서 의미가 강하다. 아브라함은 말씀의 가마솥에 자신을 푹 삶아서 헌신의 삶을 살아낸 믿음의 조상이다.
생활비 전체를 헌금하면 성도는 어떻게 살 수 있는가? 현실적 질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합리적인 십일조 제도’를 두고 있다. 쥐어짜는 생활비 헌금은 누가복음 20장 47절의 서기관이 될 수도 있다. 서기관은 과부의 가산(家産)을 집어삼켰다. 실제로 중세사회에 교황청은 베드로 성당 재건을 위해서 면죄부를 판매했고, 가난한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다. 하나님은 잔혹하신 분이 아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다음에 예수님은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셨다. 교황청이 베드로 성당을 중건(重建)해도 그곳에 하나님의 마음이 없다면, 서기관의 화려한 외식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은 겉보다 속을 보신다. 생활비 전부를 바쳤다는 것은 이미 생활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과부가 살았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때 “보고 있었다”는 동사 ‘에테오레이(ἐθεώρει)’는 과거시제 중에서도 미완료다“(크리스챤 투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헌금을 하는 그 순간, 이미 집에서 출발하던 때부터 보고 계신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은 이미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이삭을 나무에 멜 때까지 보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는 현실의 단면만 쳐다보고, 하나님은 그 현재가 있기까지 모든 과거를 지켜 보신다. 그래서 생활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헌금은 삶의 상징물이다.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는 뜻은 생활속 신앙이 헌금으로 승화해서 하나님께 드림이 된다는 뜻이다.
생명(生命)을 바치는 것이 곧 순교다. 생명(生命)은 곧 생활(生活)이다. 생활은 생명활동(生命活動)의 줄임말이다. 생활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성경을 묵상하고, 신앙의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생명을 바치는 현대인의 순교적 순종이다. 두 렙돈을 바친 가난한 과부처럼, 내 삶속에서 흐르는 시간을 하나님께 바쳐 기도와 성경묵상을 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오늘은 성경통독 요한복음 1~3장이다. 함께 동참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