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있었던 교회에서 가장 인상깊게 배웠던 성경공부는 선악과 비유(타락론)와 까마귀 비유였다. 지금도 잔상이 남아있다. 두 성경해석은 진리가 아니고,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 마치 진리의 머리카락과 같다. 말씀은 “머리 전체”다. 머리에는 뇌와 두개골과 10만개 머리카락과 모세혈관과 이목구비와 뇌신경이 존재한다. 타락론 비유와 까마귀 비유는 진리의 극히 일부분으로 “조족지혈”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그 비유가 강력한 것은 미세한 독이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
까마귀 비유는 까마귀같은 우상숭배자로 풀이했었다. 이러한 풀이법은 새우깡 먹는 수준으로 가볍게 처리해야한다. 왜냐면, 성경속에서(영왕기상 17장) 핵심은 까마귀가 아니다. 엘리야의 식사를 하나님께서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경제를 책임진다. 까마귀가 생물일지, 사람일지, 고깃집 사장일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면 반드시 해결된다.
까마귀를 우상숭배자로 해석하는 근거는 3가지다. ①떡과 고기 ②아침과 저녁 ③검정색이다. 떡과 고기, 아침과 저녁은 우상숭배자의 기우제로 해석된다. 검정색은 하나님이 보실 때 우상숭배자들이 까마귀같다고 해석된다. 아합왕은 왕까마귀, 이세벨은 여왕까마귀다. 엘리야는 눈물의 떡과 고기를 먹었다고 결론짓는다. 상당히 논리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해석이 내게는 ‘까마귀밥’과 같았으니….. 하나님의 관점이 빠진 인본의 해석에 불과하다. 그래서 맛이 별로 없다.
아합왕은 부국강병을 위해서 국제정세에 맞게 결혼정책을 취했고, 다른 나라의 종교까지 우대하면서 문화융성 정책으로 바알과 아세라의 종교까지 우대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종교가 서서히 말살했다. 무서운 일이다. 이단들의 성경해석이 아합왕과 같다. 바알과 아세라같은 인본적 성경해석을 장려하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죽는다. 영적 기갈, 영혼의 구원문제가 서서히 기울게 된다. 무서운 일이다.
‘까마귀=우상숭배자’라고 확정하면, 성경말씀은 더 이상 발전이 없다. 발전하면, “엘리야는 세례요한이다”는 명제와 맛물려서, “이시대 세례요한은 000다”라고 갑자기 삼천포로 빠진다. 000은 각 이단마다 멋대로 설정한다. T종교, J종교, S종교 모두 동일한 논법이니, 이는 이단논법이다. 절대 속으면 안된다.
엘리야 까마귀밥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가? 종교도 경제도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와서 죽기까지 보여주신 것은 1가지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절대진리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 고백한 그 믿음으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친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돌려받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돌려받았다.
하나님이 명령한 까마귀조차 ‘떡과 고기’를 엘리야에게 날마다 가져왔는데, 어찌 종교 지도자들이 성도들을 위해서 맛있는 떡과 고기의 말씀을 내놓지 않는가!! 기껏 ‘까마귀=우상숭배자’라는 새우깡같은 말씀만 내놓으면서, 성도들의 영혼을 굶어죽게 한다. 피골이 상접한 영혼들이 교회에 널렸다. 이단들의 성경해석은 영양가없는 ‘뱀의 말’이다. 선과 악이 적당히 섞여서 먹으면 죽는 ‘죽음의 식사’다. 독버섯으로 요리한 성경해석은 절대로 먹으면 안된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은 ‘인본의 성경해석’은 듣지 말라는 것이다. ‘까마귀=우상숭배자’라고 해석한 성경해석이 그와 같다.
까마귀를 우상숭배자로 해석하면, 나중에는 자신을 대접하는 세상사람들을 모두 ‘까마귀’로 규정한다. 그래서 세상은 심판받을 족속이고, 자신은 그들의 것을 차지할 엘리야와 같다고 이분법의 늪에 빠진다. 그러한 성경해석은 폭탄을 온 몸에 감고서 자폭하는 IS와 같다. 정말로 위험한 성경해석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말씀하시며, 가장 먼저 베드로를 심판했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반대하자,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다. 베드로를 사탄으로 규정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부터, 제자부터, 유대인부터 차례로 적용된다. 이분법으로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분법은 이단논법(異端論法)으로 자주 활용된다. 이분법은 진리가 아니다. 요한복음에도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곧 빛인데, 빛이 세상에 왔을 때 어둠이 빛을 못 알아봤다고 했다. 이것만 보면 이분법이다. 그런데, 빛을 증언하는 세례요한이 등장한다. 세례요한은 누구인가? 여기서부터 이분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신랑, 예수님을 맞은 자를 신부로 증거하면서, 자신은 신랑의 친구로 소개한다. 이것도 이분법이 아니다.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증거를 믿고서 예수님께 소속을 바꿨다. 그리고 형 베드로를 전도했다. 증거하는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서 새로운 증거자들이 생겼다. 이분법에서 계속 파생되는 새로운 세계다. 이분법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나는 성도들에게 조언한다. “이분법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강력히 권고한다. 이분법은 너무 위험한 성경해석이다. 다양하게 접근하면서 성령을 통해서 성경의 깊은 맛을 느끼고, 알아야한다. 어제는 이렇게 해석되던 것이 오늘은 저렇게, 내일은 요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 절대적 진리는 오직 말씀이며, 말씀이 말씀을 해석하는 진리의 성령을 통해서 사람은 살아갈 뿐이다.
누가복음에서 5천명이 빈 들에 있었을 때, 제자들에게 오병이어 축사를 하시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했다. 제자들을 까마귀로 삼은 것이 결코 아니다. 제자들을 우상숭배자로 만든 것이 결코 아니다. 까마귀를 우상숭배자로 특정할 경우, 인식관이 고착되면서 서서히 우상적 신앙인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인본적 성경해석을 극히 조심하라는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했듯이, 먹을 것을 줘야한다. 먹을 것은 바로 ‘먹지 못할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열매’다. 먹었을 때 하나님이 보이면, 영적인 신령한 양식이요, 먹고나서 세상이 보이고 자신의 벌거벗음이 보이면 뱀의 양식이다. 둘은 이렇게 구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