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수형 접미사 ‘들’속에서
며칠 전, 나는 주님께 이실직고했다. 내 인생의 실패를 자백했다. 경찰에 범죄를 자수(自首)하면 형량이 감해진다. 주님께 나의 무능함과 고단함과 비참함에 대해 ‘실패와 패배’를 결론내고, ‘고뇌의 쓴 잔’을 눈물에 섞어서 마셨다. 그때, 십자가가 내 척추로 쿵 내려치는 느낌이 들었다. 아!! 고단한 내 삶에 또 무슨 십자가랴!!
오늘은 마태복음 4장을 10번 넘게 읽었다. 그냥 거울을 보듯이 하나의 단어를, 하나의 문장을, 사건을, 사연을 읽는다. 의미없이 읽는 것이 아니고, 그때 상황을 드라마처럼 연상도 해보고, 3장과 5장을 연결해서 파노라마처럼 펼쳐보면서 성경을 상상한다.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자꾸만 멈춘다.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라는 문장에서 자꾸만 마음이 간다. 가버나움에 괄호를 치고서 “장안동”이라고 썼다. 하하하!!!
‘이방의 갈릴리’에는 밑줄을 치고서 ‘이단의 갈릴리’라고 적었다. 그늘에 앉은 자들에도 괄호를 치고서 (장안동 장창훈)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읽어보니, 의미가 새롭다. 잘못된 비진리에 속했던 나에게 주님이 오셨음을 믿게 되었다. 이방(異邦)과 이단(異端)은 단어의 어원이 같다. 당시 갈릴리는 광주처럼 무장항쟁이 매우 투철한 곳으로, 십자가의 길과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민족주의자들의 본거지였다. 십자가를 부정하는 모든 종교는 ‘영적 이방의 갈릴리’다.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이단)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장안동 장창훈)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마태복음 4:16)
내가 실패를 인정하자, 주님의 면류관이 내게 왔다.
내가 그늘에 있음을 인정하자, 주님의 빛이 내게 왔다.
내가 사망에 있음을 깨닫자, 주님의 생명이 내게 왔다.
내가 비진리에 있음을 인지하자, 주님이 진리가 되셨다.
내가 흑암의 백성임을 자수하자, 주님은 천국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나는 어둠을 벗어난 이방인이다. 천국시민이 된 것은 주님의 빛이 내게 주어짐으로 된 것이다. 마태가 인용한 이사야서 9:1에서 ‘그늘에 앉은 자들’에서 ‘들’의 복수형 접미사가 어찌나 고맙고, 놀라운지, ‘들’속에 내가 있음을 나는 믿어진다. 그래서 ‘들’에 괄호를 치고서 내 이름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