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옮긴 교회가 내게 울림을 준 이유중 하나는 “반성의 거울”을 말했기 때문이다. 기존에 다녔던 교회는 물론 상당히 잘되었다. 날마다 풍성하고, 자부심을 주는 말씀이 쏟아졌다. 어제 말씀을 기억하지 못할 새로운 말씀이 쏟아졌다. 말씀은 넘쳤다. 그러나, 자기 반성이 부족했다. 내 삶에 있어서 그러하다.
나는 신앙인이다. 기독교인이다. 성경을 알아야한다. 불교인이 불교경전의 맥락을 알지 못하면서 ‘목탁’을 두드린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큰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성경의 맥을 알아야, 성경이 예언한 사명자가 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예언으로 온 사명자를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을 전혀 몰랐다. 모르면서, ‘모르는 사실’조차 전혀 몰랐다.
나는 날마다 하나님께 묻는다. 물어야만, 한다. 성경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했다. 골방은 곧 ‘홀로 남겨진 곳’이며, 미세한 소리조차 울림이 되는 침묵의 공간이다. 매스컴의 광풍속에서 미세한 신의 소리가 숨겨져 있을 수 있다. 그것을 듣는 자가 ‘성령의 소리’를 듣는 고막을 가진 것이다. 주님은 그 소리를 들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엘리야는 아합정권을 몰락시켰고, 엘리사는 예후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렇게 해도, 예후정권은, 예후왕조는 100년 남짓 유지되었고, 예후왕은 바알 선지자를 완전히 소탕했으나, 이후 왕들은 여전히 바알숭배가 진행되었다. 왕의 권력을 갖게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100년 남짓 살아간다. 마치 예후 정권과 흡사하다. 아합정권처럼 평생 세상권력에 취해서 사는 자가 있고, 예후정권처럼 초반에 강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다가 점점점 세상의 길로 타락하는 자가 있다. 다윗처럼 골리앗을 무찌르는 영웅심으로 세상권력을 맛보다가 도망자 신세를 겪으면서 하나님의 신앙으로 변화하는 자가 있다. 각양각색 다양하다. 나는 어떠한가?
무엇이 소중한가? 오늘 방금 어떤 분이 전화를 주셨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소중히 생각하면서, 다툼을 화합으로 만들기 위해서 고통스런 삶을 살아내는 사연을 들으면서, 누구든 주어진 직업이 곧 ‘단상’이다. 교회는 곧 사회다. 불교인은 불심으로 살 것이요, 기독교인은 예수의 정신으로 살 것이다. 나는 예수의 정신으로 살아간다.
새롭게 옮긴 교회에서 목사님이 말씀했다.
1. 예수님과 자신은 어떤 사이인가? 예수님이 그대를 아는가? 예수님이 “내가 너를 안다”고 하는가?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는가?
2. 예수님이 아는 사이가 되었으면, 달란트를 가지고 무엇을 했는가? 예수님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남겼는가? 자기 재능과 직업의 달란트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남겼는가? 남기지 못한 1달란트 가진 자는 지옥으로 쫓겨났다. (마태복음 25장)
성경을 깊게 묵상하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렴풋이 보인다. 그저 맹목적으로, 그저 몽유병처럼 예수님을 믿다가는 세월호처럼 구원의 참사를 당할 수도 있다. 구원문제는 심각하게 결정해야한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은 호세아다.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고,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체결했다가 멸망당했다. 멸망당하기까지 200년 남짓 걸렸다. 남유다는 340년이다. 천년왕국을 기대했으나, 조선왕조보다 일찍 멸망을 당했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했다. 남유다는 바벨론에 민족 전체가 끌려갔다. 남유다는 ‘다윗왕조의 몰락’을 보여주고,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몰락’을 보여준다. 왜 하나님의 민족이 멸망당할까?
열왕기하 17장에는 그 원인이 자세히 적혀있다. 열왕기상 17장은 엘리야 선지자의 출현이 나오고, 열왕기하 17장은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그 원인이 나온다. 결국,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행’(惡行)을 행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좋은 길이 때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길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엘리사는 예후 장수를 은밀히 불러서 ‘군사 혁명’을 명령했다. 하나님을 믿는 예후는 엘리사의 예언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믿고, 반란을 일으켜서 혁명이 성공했다. 아합왕조(오므리 왕조)의 몰락이다. 그리고 예후왕조가 들어섰다. 예후 왕조는 100년 이어진다. 여로보암 왕조(50년) 바아사 왕조(50년) 예후왕조(100년) 이후 암살과 내란과 반역의 시대를 거쳐 멸망당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없었다면, 아합왕조(오므리 왕조)는 부국강병을 이뤘을 것이다. 엘리야는 가뭄을 선포해서 농업경제에 직격탄을 선포했다. 요즘 시대에 어떤 선지자가 ‘금융대란’을 선포한다면, 부동산 가격은 폭락할 것이다. 혹은 IMF 사태에 직면할 것이다. 선지자의 선포가 없더라도, 국가의 경제적 부도가 발생했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겸허히 반성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은 촛불혁명으로 새로운 정권을 창출했으나, 과연 박근혜 대통령이 ‘이세벨의 대명사’로 판단될 수 있는가? 김정은은 평화통일의 열쇠를 가진 인물인가?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엘리사가 예후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목했을 때, 예후가 “아멘”으로 수용한 것은 신앙심 때문이다. 예후는 엘리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적 믿음생활을 했던 신앙인으로 추정된다. 서로의 신뢰관계가 없는데, 엘리사가 무턱대고 “예후”를 왕으로 기름붓는 축복권을 줬을까? 축복 이후는 하나님의 신앙과 얼마나 연결되느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