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사역은 구분과 지칭이다. 창세기 1장은 어둠과 빛을 구분하고, 각각 이름을 부여한다. 물과 물을 구분한다. 물과 뭍을 구분하고 이름을 부여한다. 광명체를 만들어서 시간을 다스리게 하고, 움직이는 생물체도 만든다. 가장 마지막 단계는 동물중에서 사람을 구분해서 창조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한다. 구분과 지칭이다.
구분은 ‘이름을 부여하면서’ 나머지를 제한한다. 차별(差別)은 구분과 지칭의 다른 표현이다. 가령, 우리가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는 순간, 짬뽕을 먹지 않는 것이 된다. 또한 중국집에 들어가는 순간 다른 모든 식당은 배제된다. 구분과 지칭은 항상 차별을 가져온다. 구분과 지칭이 없다면, 창조도 없다.
누가복음 6장에서 제자들을 ‘구분과 지칭’하는 ‘임명식’이 펼쳐진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라고 했다. 많은 제자들을 불렀고, 그 중에서 열둘을 예수님이 택했다.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것이다. 지도자로 임명하는 순간, 구분과 지칭이 일어나며, 차별이 발생한다. 열둘은 선택받았고,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제자들이 생긴다. 이제, 그 경계선은 어떻게 허물 것인가?
예수님은 2가지 방법을 택하셨다. 첫째 방법은 선택하기 전에 밤새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겼다. 예수님이 12사도를 선택한 것 같아도, 그 내막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눅6:12)라고 했다. 많은 제자중에서 12사도를 임명하는 것은 엄청난 파급력을 낳는다. 파급력에는 조직의 부작용도 포함된다. 선택하는 순간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가 구분된다. 두 세력은 항상 긴장한다.
두 번째 방법은 철저한 정신교육이다. 세상권력은 사명의 면류관을 받는 순간 소유가 발생하고, 각종 이익이 생긴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베드로 성당 리모델링을 위해서 추진되었으나, 더 깊은 비밀은 추기경 선거자금 때문이다. 추기경들이 선거에 출마할 때마다 사채를 끌어서 비용을 사용했다. 추기경이 된 후에는 빚을 갚아야하니, 면죄부를 판매해서 성도의 고혈을 빨아야했던 것이다. 세상권력의 전형적 형태다.
예수님은 12사도를 임명하고, 공무원 강령보다 무서운 정신무장을 시켰다. 이때, 12사도만 따로 교육하지 않고, 제자들이 있는 곳에서 모두에게 교육했다. 부름받는 사역은 오명(汚名)과 치욕(恥辱)과 멸시(蔑視)를 위함이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섬기기 위해서이다. 12사도를 특별히 뽑은 것은 나머지 제자들을 섬기라고 세운 것이다. 이것으로 둘의 경계선이 허물어진다.
어떤 어머니가 케익을 사오자, 두 아들이 서로 많이 먹겠다고 싸운다. 그때 어머니는 케익칼을 가져와서, “칼로 나누면, 선택하기”의 규율을 준다. 형이 칼로 케익을 나누면, 동생이 나눠진 케익중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누가 먼저 칼을 들까? 칼을 드는 것과 선택하는 것은 동시에 주어지지 않는다. 세상권력은 칼을 들면서 케익의 선택권을 갖는다.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 ‘세움을 받은 순간 눕힘’을 당하는 명령을 받는다. 이것이 인자의 권력이다. 예수님은 “원수사랑”까지 명령하셨다.
이제, 공무원 강령보다 엄격한 12사도 훈시 말씀이 읽는 독자에게 전해진다. 이 말씀은 실천하기가 너무 버겁고, 힘들다. 실천하면, 반석위에 세움을 받는 집이 된다. 집의 크기와 규모보다, 반석위에 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반석위에 짓지 못하면, 홍수가 나면 무너진다. 반석위에 지어야만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 홍수는 곧 죽음과 각종 환란을 뜻한다. 읽는 독자가 누가복음 6장 말씀을 행실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친다면, 예수님의 사도교육을 받고서 사는 것이다. (눅6:2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