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설교를 되새김질한다. 그 방법은 설교노트에 있다. 설교말씀을 노트에 단어와 구절로 적은 다음, 집에 가서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설교를 재편집한다. 어떤 것은 ‘암호’처럼 기록된 것도 있지만, 나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설교를 완성한다. 이러한 노력은 내게 창조성을 부여한다. 설교노트를 보는 순간, 내 마음은 설레임으로 파도친다. 지렁이처럼 기어가는 글자들이 문장으로 만들어지면서, 의미있는 옷을 입게 될 것을 생각하면 흐믓하다.
나는 녹취를 매우 싫어한다. 언론인으로서 약간 괴짜같은 길을 걸었다. 배울 때는 녹취를 해서, 인터뷰를 작성해야한다고 교육을 받았으나, 그렇게 했을 때, 나는 로봇이 되야했다. 게다가 현장에서 취재를 하고, 인터뷰를 다시 들으면서, 정리하는데 최소한 5~6시간이 걸렸다. 인터뷰를 한번 나갈 때마다 내게는 곤혹이었다.
이후, 노트필기로 방향을 바꿨다. 필기한 것을 중심해서 언어를 다시 만들고, 뺄 것은 빼고, 첨가할 것은 첨가해서 인터뷰 문장을 재창조했다. 그렇게 10년을 하다보니, 설교를 듣는데도 적용된다. 참 신비한 일이다.
“하나님을 통제 조작 … 하나님 보내서 왔는가? 통제된 대답, 내가 왔는가? 하나님이 어찌 내게, 은혜속에 있는가? 내가 오면 몇 년째?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할 수 있어? 낮아지고, 복종하고, 고난신앙은 보상 아님. 보상없음. 풍성한 은혜”
– 설교노트
내 설교노트에 적힌 단어들이다. 이러한 문장은 유효기간이 1~2일이다. 7일이 지나고 읽으면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1~2일안에 읽으면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단어와 단어를 다시 연결해서 문장을 살려내면, 다시 읽어도 내게 감동이 밀려온다.
어차피 설교는 모두 적지 못한다. 말은 빠르고, 손은 느리다. 손으로 모두 적었다고 해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며, 인식했다고 감동으로 스미는 것도 아니다. 결국, 적은 다음에 되새김질하면서 성령께서 깨달음의 눈을 열어주셔야 말씀의 은혜가 밀려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통제하고, 조작하고, 다스리려고 한다. 오늘 예배에 내가 왔는가? 하나님이 보내서 왔는가? 하나님이 보내서 왔다고 대답하는 성도가 있는데, 그 대답도 통제된 것일 수 있다. 내가 왔다고 생각하는 성도는 교만이 생긴다. 이렇게 예배로 섬겼는데, 하나님이 어찌 내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섬김의 댓가로 기도를 왜 들어주지 않으시는가?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은혜속에 있으면 감사만 나온다. 오늘까지 도대체 몇 년째인가?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하시면 안되지, 이런 마음이 하나님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히 낮아지고, 복종하고, 고난신앙을 사셨다.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한 것이 아니다. 낮아짐과 복종하심이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며, 길이었다. 보상은 없으나,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다.”
– 설교노트 돼새김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