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세상의 창문을 열고, 문밖을 나와보니, 말세다. 사랑과 정의와 변화와 평화와 대통합의 이름으로 ‘분노와 혁명’이 폭발한다. 각종 새로운 단체가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면서, 기존을 향해 무차별 핵폭탄을 터뜨린다. 그런 말들을 곁에서 듣고 있으면, 나는 ‘YES와 NO’를 선택해야만 한다.
아!!! 나는 “능력이 없고, 전전긍긍 살아가는 하루살이”라고 인정하고, 빠져나왔다. 청년의 때에는 “내가 해야죠!!”라면서, 그들의 정의로움에 합세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1달, 1년, 10년이 흘렀다. 남는 것은 언제나 고래의 앙상한 뼈다.
오늘도 누군가를 만났다. “서울교육방송에서 홍보를 맡아야죠.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국민 대통합 30만명 궐기대회를 위해 홍보총괄을 담당해야죠!!” 나는 그때 속으로 물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 광야의 소리인가?”라고. 나에게 계급장을 주려는 그 사람은 ‘교육방송’에 방점을 뒀다. 나는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나는 모나미 볼펜을 내보이면서, “저는 모나미 볼펜처럼 작고, 볼품없는데, 모나미 회사처럼 과대포장하시고, 능력을 기대하시니, 저는 자격미달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분위기가 겨우 정착됐다.
모든 협회는 사회변혁을 외친다. 예수님도 ‘변화’를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에도 이분법이 들어있다. 변화를 외치는 것은 ‘기존과 새로움’이 전제된다. 예수님은 이분법을 말씀하면서도, 그 적용대상을 자신부터 한다. 세상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은 예외조항으로 둔다. 변화를 외치려면, 자신부터 시작해야한다. 이것이 성경적 진리다. 사랑과 화합을 외치면서, 기존 사람을 매도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이런 경우를 매우 자주 목격한다.
어제 들었던 설교말씀이 오늘 많은 도움을 줬다. 역시, 말씀은 예방주사처럼 항체를 형성시킨다. “분별하라”는 말씀을 듣고서, 사람들의 말을 자세히 듣고 관찰해보니, 보이지 않는 속내가 얼핏 보였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사람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그런 세상놀음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다. 인생이 그렇게 하잖게 쓰일 존재는 아니다.
동학혁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산물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리 역사적으로 포장할지라도, 무수한 사람을 희생해서 얻은 댓가는 외국군대가 들어오는 빌미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만이 인류의 희망이다. 동학혁명은 녹두꽃을 통해서 자세히 재현되고 있듯이, 공산주의 혁명과 상당히 닮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