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를 타고 와서 예수님께 경배하는 동방박사 이미지는 마태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다. 마태는 동방박사를 그러한 의도로 말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2장은 동방박사의 출현인데, ▲소동 ▲모사 ▲반역 ▲학살 ▲피신 등의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더라”(마2:10)는 구절을 제외하면, 슬픔의 강물이 흐른다. 동방박사만 좋아한 것이고, 요셉과 마리아는 갑작스런 경배를 받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야했다. 누구도 기뻐하지 않을 동방박사의 출현은 누구의 작품인가? 왜, 하나님은 별을 보이시고, 왜 하나님은 그 사건을 마태가 알게 하시고, 왜 하나님은 그 사건을 성경에 기록되게 했을까?
“마태가 제정신인가!!”
이런 생각이 든다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고, 동방박사처럼 그저 기뻐만 한다면, 죽은 정신이다. 아기 예수가 죽음에 직면하고, 6.25 사변처럼 피난길에 처한 사건이 일어났고, 게다가 수십명의 죄없는 아이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들의 피값은 누구때문인가? 왜 그들은 죽어야 했을까? 마태는 왜 이런 질문이 일어나도록 했을까?
마태는 드라마 작가로서 감각이 있다. 족보장을 보면, 마태는 “재미없는 작가”로 여겨지지만, 족보장을 없애면, 예수님의 탄생과 동방박사 출현, 유아 대학살 사건은 흡인력이 굉장하다. 주인공의 탄생을 설정한 배경이 흥미진진하다. 드라마틱하게 쓰려고, 마태는 ‘이혼문제와 살인사건’을 초반부에 썼을까?
꿈꾸는 요셉, 이집트로 피신한 요셉, 라헬의 애곡…. 마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다. 많은 사건과 인물중에서 왜 마태는 이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선택해서 편집했을까? 낭만적인 동방박사의 이미지를 벗어나면, 예수님의 정체성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마태복음 2장에서는 헤롯왕 때문에 죽임을 당할 뻔 했고, 수십명의 아이들은 피를 흘렸고, 마태복음 3장에서는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받은 예수님이 곧바로 사막으로 쫓김을 받는다.
동방박사의 선물을 받자마자 예수님은 이집트로 피신했다.
세례요한의 요단강물 세례를 받자마자 예수님은 사막의 광야 시험을 받았다.
이런 선물, 받아야하나?
이런 물세례, 받아야하나?
우리는 물어야한다. 그래야, 우리도 이런 값진 선물을 받을 수 있다. 피난길을 떠나게 하는 선물을 받고, 사막의 광야길로 가게 하는 물세례를 받게 된다. 길을 걷다가, 아는 지인이, 드라마를 통해, 욕세례를 받았는데, 그것으로 마음이 요동친다면, 그러한 소동으로 사막의 광야길을 걷게 된다면, 하나님이 개입하신 일일 수도 있다.
이러한 질문없이 성경이 읽힌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짜깁기된 교리에 갇혀서, 마태를 통한 성령의 감동이 느껴지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스스로 점검해야한다. 의혹투성인 성경을 읽으면서, 질문이 생기지 않다니….. 정치인은 마태복음 2장의 헤롯왕에 자신을 대입하고, 종교인은 3장의 세례요한에 자신을 대입하고, 성경을 다시 읽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