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를 아는 지식을 읽으면서
반석위에 세워진 집은 교회다. ‘반석’은 곧 예수님이다. 구체적으로 성육신, 십자가 대속, 육체 부활(탄생, 죽음, 부활)이다. 예수님은 3가지 사건을 표적으로 이 땅에 나타나셨다. 십자가 무용론을 설명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위하여’라고 하지만, 십자가를 제거하는 순간 예수님과 결별한다. 할례를 받으면, 아브라함에게 속하고, 세례를 받으면 신약의 문을 열며, 십자가의 세례를 통해 예수님께 속한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아브라함에게 속하지 못하듯, 십자가를 통하지 않으면 예수님께 속하지 못한다. 그래서, 거짓된 자들이 십자가를 교묘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반대하는 논증에는 3가지가 사용된다.
1. 성육신을 반대하면서 십자가를 폐지한다. 십자가의 대속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성육신이 거짓이면, 사람이 십자가를 진 것이 되고, 결국 십자가는 ‘깨어진 뜻’으로 변질된다. 십자가를 안져도, 구원을 시킬 수 있다고 그들은 설명한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다. 성령잉태설은 성경적 사실이다. 이것을 믿을 때, 믿는 성도는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2. 예수님의 육체부활을 반대하면서 십자가를 폐지한다. 십자가는 육체부활을 통해서 깊은 의미를 갖는다. 이집트 출애굽 당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죽을 위기에서 육신으로 홍해를 건넜다. 모세가 어린 시절 물에서 건짐을 받듯이, 80년후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건짐을 받았다. 그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으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육체가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났듯이, 믿는 성도들도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만약, 육체가 살아나지 못하면, 죄가 육체를 죽였으니, 예수님은 승리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은 죄와 함께 무덤속에 갇혔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군대와 함께 홍해속에 들어가듯 그러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무사히 건넜고, 이집트 군대는 수장(水葬)됐다. 그처럼 예수님의 육체는 살아나서 ‘신비한 영체’로 부활했다. 육체가 살아난 것이 사실이다. 죽임을 당한 것은 이집트 군대다. 모세가 육체로 홍해를 건너듯, 예수님도 육체로 무덤을 건넜다. 제자들이 그것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육체가 사라졌다면, 육체가 죽었다면, 제자들은 ‘십자가’를 애도하고, 슬퍼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애도’가 아닌 ‘축제’를 했고, 부활의 행복을 맛보았으며, 무덤을 숭배하지 않았다. 시체가 영원히 죽지 않아서, 무덤을 숭배하지 않았다.
3. 십자가를 ‘저주의 십자가’로만 해석한다.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지셨다. 그런데, 권력의 관점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힌 것으로, 정치적 누명과 억울함을 당한 것으로만 생각한다.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였다. 왜냐면,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없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믿는 자마다 죄의 홍해를 건널 수가 있다. 권력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보면 안된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성경적으로 봐야, 십자가의 진실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 신약에서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 구약의 에덴동산에는 ‘선악나무와 생명나무’가 있었고, 신약의 에덴동산에는 ‘십자가와 예수님’이 계신다. 십자가를 제거하면, 예수님도 함께 사라진다. 이것을 명심해야한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사명이다. 성육신-십자가-육체부활은 어떤 것도 폐지해서는 안된다. 3가지를 절대로 믿고 확신하는 그 반석위에 세워진 신앙은 어떤 환란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구약의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사망나무가 되었으니, 생명나무로 예수님이 다시 오신 것이다. 생명나무로 주님이 오늘도 살아계신데, 왜 또 다른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인가? 사람에게 생명이 하나이듯, 인류의 생명나무도 오직 예수님 외에 없다. 이것이 성경적 진실이다.
이것이 ‘예수를 아는 지식’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믿는 성도는 3가지(성육신-십자가 대속-무덤부활)에 대해, 주님은 내안에 성육신으로 임하였는가, 주님은 나의 죄를 대속하셨는가, 주님은 내 육체속에 부활하여 살고 계시는가를 진실로 물어야한다. 성육신은 시작, 십자가 대속은 마침표, 부활은 새로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