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018년 2월 7일 결심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살기로, 오랜 신앙생활을 했으나,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한 내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성경만 읽었으나, 성경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해 11월 종교탐방을 했고, 새롭게 옮긴 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을 만났다. 오!! 나의 예수님!!
“예수님은 구약의 답이고, 주인공이고, 주인입니다. 주인은 열쇠를 갖고 있듯, 주님이 구약의 주인공입니다.”
설교때 들었던 말씀이다. 이때부터 성경이 깊게 읽히기 시작했다. 구약성경을 구약으로만 봤던 ‘구약차원’을 벗어나서, 새로운 차원으로 보게 됐다. 예수님의 관점이다. 대속적 그리스도의 십자가 관점으로 구약을 이해하니,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다윗의 13년 망명생활도 예수님의 어린시절 피난으로 이해되었고, 사울의 단창 사건은 헤롯왕의 학살로 이해되었다. 다윗이 돌로 골리앗을 죽인 사건도 ‘흰돌’이신 예수님으로 이해됐다. 구약성경에 알고 있던 모든 사건들이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생각났다. 오!! 진리의 성령이여!!
내가 감사할 것은 ‘겨자씨 속도’를 권면해주신 목사님의 자애로움이다. 지식을 탐구하듯 욕심내는 내게 어느날, “겨자씨처럼 성경을 읽어봐요”라고 내게 조언을 해주셨는데, 그때부터 복음서를 1장씩 읽기 시작했고, 벌써 8달이 지났다. “읽을 때마다 작은 사건마다 소제목을 달아보세요”라고도 알려주셨다. 그 권면이 내게는 성령의 말씀으로 임재했다. 그리고, 실행했다. 2018년 2월 7일, 옛날교회에서 성경을 읽고 싶다고 하나님께 호소했는데, 하나님은 내게 그 소원을 들어주셨고, 지금은 복음서를 통해 살아가는 성도가 되었다. 오!!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여!!
오늘은 9월 16일 누가복음 16장을 읽었다. 15장과 연결된 비유설교인데, ‘불의한 청지기’와 ‘거지 나사로’ 비유가 나온다. 두 비유의 중반부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 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과연,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가?
어제 설교에서, 나를 당혹시킨 성경해석은 “사라의 죽음”이었다. 얼마나 놀랬던지…. 하갈을 학대한 것, 이스마엘을 쫓아낸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만 이해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갈라디아서에 바울이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바울의 성경해석만을 받아드려, 그렇게만 성경을 봤던 것이다. 창세기 원문의 근본사건을 다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봤다.
16장에서 사라가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줬고, 임신한 하갈이 멸시를 하자, 그것을 사라가 분해서 견디지 못하면서, 아브라함과 판단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교회에서 자주 거론되면서, ‘영적 기싸움’을 하는데 사용된다. 성경을 잘못 악용하는 종교인들의 어리석음이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이기고, 아브라함이 사라의 요구를 받아드리니, 사라가 하갈을 학대했다. 학대는 매를 든 것이다. 임신한 이스마엘이 낙태될 수도 있으니, 하갈이 도망쳤고, 그것이 하갈의 축복이 되었다.
21장은 이삭출생 및 하갈과 이스마엘 추방이 나온다. 22장은 이삭번제 사건이다. 23장은 아내 사라의 죽음이다. 이삭을 낳자, 입양한 이스마엘을 추방하도록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요구했다. 오!! 어찌 이런 일이!! 갈라디아서의 바울 비유를 배제하고, 해당 사건을 원문으로만 해석하면,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무슨 잘못이 있을까. 나이가 많은 형이 어린 동생을 놀리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그런데, 사라는 그것을 빌미로 ‘유산상속’에서 배제시킨 것이다. 그 사건 때문에 추방당한 하갈과 이스마엘은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시험문제가 찾아왔고, 결국 사라가 죽었다. 하나님께서 숯양을 준비해서 ‘이삭’은 살렸지만, 하갈의 통곡처럼 사라는 통곡하다가 죽음을 맞은 것으로 풀이된다.
인생, 겸허하게 낮아져야한다. 원수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줘야한다. 추방당한 하갈이 오히려 축복을 받았고, 갑질을 한 사라는 도리어 충격받고 죽음을 당했다. 모든 주인은 하나님이다. 하나님께 겸손히 엎드려, 성령의 은혜로 살아가야한다. 인생 중년에 내게 성경과 성령으로 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