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를 3KO로 물리친 예수님은 ‘영광의 월계관’을 쓰지 않았다. 요한이 잡힌 것을 듣고, 갈릴리로 가셨다가, 이사를 하셨다. 제자 공동체가 거주하는 가버나움으로 주소를 옮기셨다. 그리고, 어부들을 전도했다. 우리는 “어부”라고 하면, “사회적 빈곤층”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전혀 아니다. 그 시대 중산층이다. 갈릴리 지역이 거제도라고 한다면, 그곳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조선업의 하청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 시대에 배를 가졌다는 것은 이 시대에 빌딩을 가진 것과 같다. 부유함은 상대적인 것이다. 게다가 가버나움은 지금의 ‘인천과 부산’처럼 항구도시였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했다. 주어(主語)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직접 “나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여행을 보냈다. 그들은 사도(使徒)다. 사도는 심부름꾼이다. “예수님의 부름”을 대신 전달해준다. 사도들이 사람들을 불렀을 때, 그 또한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해서 부른 것이다. 이 시대도 동일하다.
나는 1986년 중학교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순복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1989년에도 예수님께서 친구를 통해 ‘복음으로’ 나를 불렀다. 기독교는 내게 성경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나는 성경의 구원이 궁금했으니, 1989년 나는 이단교회로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 마태복음 4장에도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갔다. 이단교회에 가는 것도, 그곳을 나오는 것도,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자들은 아직도 시험을 보는 중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예수의 가면을 쓰고 성자가 나타났다”
2016년 즈음 들었던 이단교회 설교말씀이다. 그때 충격은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성자 예수를 쪼갤 석(析)으로 쪼갠다면서, 성자와 예수를 쪼갰다. 성자도 계시고, 예수도 계신다. 그때 성도들은 혼비백산했고, 나도 너무 괴상했는데, 나중에는 삼위일체를 삼신론(三神論)으로 받아드렸다. 지금 돌이켜보니, 유일신 사상을 잘못 오해한 지도자가 삼신론으로 변질된 것을 알게 됐다.
“그 지도자의 가면을 쓰고 예수가 오셨다”
이것이 나의 고백이다. 예수님은 본체다.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창자국까지 보이셨다. 예수님은 실체다. 나는 본래부터 예수님의 인도를 받고, 예수님이 좋아서, 이단교회에 갔던 것인데, 예수님의 존재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렇게 예수님이 사라진다면, 결국 지도자의 존재도 사후에 사라질 것이다. 바울의 위대함은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그 누구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밀알이 되어서 백성의 죄를 대신하지 않았다. 대속적 그리스도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의 참사랑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면 안된다. 구원은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진다. 신약의 주인공은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을 없애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어찌 영광인가?
때가 되니, 예수님이 다시 나를 불렀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시듯, 이단교회를 떠나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곳을 1년 전에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