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오!! 85세, 백전노장 갈렙의 외침은 십자가다. 이것은 분명 십자가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하고, 철병거가 있고, 거인들이 득실거리면서, 난공불락의 철옹성 “헤브론”을 지목한 갈렙!! 그의 관점은 무엇인가? 똑같이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인데, 똑같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고, 똑같이 모세가 구스의 여인을 취한 사실을 들었을 것이고, 똑같이 원주민의 거대함을 보았을 것인데, 그는 그들과 무엇이 달랐을까?
40세에 모세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담대히 증거했던 갈렙이 45년이 지나서, 여호수아 앞에서 동일한 믿음을 꺼내 보인다. 함께 갔던 12명의 정탐꾼 중에서 10명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살아남았으니, 어찌 그 때를 잊으랴!! 그는 신광야 38년과 가나안 정복 7년을 통틀어 “광야생활”로 정의했다. “저 산지가 정복되기까지” 갈렙에게는 가나안도 광야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45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85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여호수아 14:10)
그 산지는 모든 사람들이 꺼렸던 곳이다. 갈렙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를 여러번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갈렙은 믿었다. 45년전, 10명의 정탐꾼은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에 따라 정확히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그들을 상대해서 이길 수 없음만 알았고, 하나님의 힘으로 그들을 상대해서 싸우는 것은 생각조차 안했다.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사람은 불가능해도, 하나님이 도우시면 가능하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이 행하여 그 땅을 나누었더라” (여호수아 14:5)
가나안 정복은 분배를 통해 종결됐다. 우리에게 주어진 ‘무엇’에는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포함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에브라임 족속에게 모든 땅을 주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그 기준에 따라 배분했다. 우리에게 있는 ‘무엇’도 ‘나눔과 배분’을 잘해야한다.
십자가를 통해 죄사함을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살아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는 개인의 욕정을 위해 쓰라고 준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쓰실 이유와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 받은 축복은 분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확정된다. 축복을 하나님의 뜻으로 분배하지 못하면, 여전히 방황의 광야를 맴돌 뿐이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47년 넘게 동거동락(同居同樂)했다. 여호수아가 대통령이면 갈렙은 부통령이다. 그는 충분히 이미 정복된 평지를 분깃으로 받을 수도 있었다. 또한, 9지파와 므낫세 반지파가 제비뽑기를 하면, 1/10의 확률로 ‘헤브론’이 걸릴 것인데, 그는 모두가 꺼리는 그곳을 기꺼이 가겠다고 나섰다.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85세 갈렙의 힘이 40세 때와 동일한 것은 ‘힘의 원천’이 여호와로 말미암음이다. 우울증과 권태는 인생을 좀먹는 아낙자손과 같다. 갈렙처럼 위대한 선언을 해야한다.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여호수아는 갈렙을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으로 삼게 했다. 그가 바로 유다지파다. 기생 라합과 결혼한 살몬도 ‘갈렙’을 통해 ‘믿음의 경건함’을 배웠을 것이다. ‘저 산지’를 정복한 갈렙의 견고한 ‘믿음산’을 나도 올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