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마가복음 11장이다. 나귀 새끼를 직접 준비하셨다. 제사장들의 집성촌인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맞은 편 마을에 있는 어떤 나귀를 지목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고, 그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오게 했다. 마가는 왜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 스가랴서 9:9과 14:4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다. 마가는 구약의 많은 예언 중에서 스가랴서를 통해 주님의 대제사장적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14:4]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으로 남으로 옮기고
무엇이 풀렸는가? 주님께서 쓰시려고 풀어주셨다. 주님의 십자가 피흘림이 있어서, 구원이 임한다. 참새 1마리도 전깃줄에서 그냥 떨어지지 않는다. 얼음이 녹고, 나무에 싹이 돋는 것은 ‘성령의 봄’이 온 것이다. 주의 말씀이 빛이 되어 이방의 갈릴리에 어둠이 물러간다. 인생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있어서 그렇다.
세상이 보기에 ‘무소의 뿔’을 가지지 못했어도, 주님께서 사용하시면, 그 걸음이 위대하다. 나귀새끼도, 겉옷도, 호산나 찬양하는 성가대의 합창도 모두 주님의 군사다. 주님께서 예언을 성취하신 모습을 유념해야한다. 스가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찬란한 영광을 묘사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나귀새끼’처럼 초라했다. 주님은 식민지 나라에서 백성의 아들로 태어나 말구유에 뉘었다. 예언을 성취한 육신의 발자국이 신비한 것이다. 혹여, 먼지처럼 살아가는 인생일지라도, 그 속에 주님의 형상이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백성들의 죄를 빌미삼아 돈벌 궁리만 했다. 주님은 매매하는 상인들과 제물들을 모두 내쫓았다. 마가는 그 사건을 ‘저주받은 무화과 나무’로 비유했다. 실제 사건이다. 주님이 배고파서 먹을 것이 혹시 있나, 가까이 갔더니, 작은 무화과조차 없었다. 예루살렘의 성전기능이 그러했다. 잎만 무성하고, 하나님이 기대하는 열매가 전혀 없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다. 계시록에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이 경고했다. “촛대를 옮기리라!!”
나귀를 풀어준 목적은 주님을 태우기 위함이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헤롯성전을 허락한 목적은 백성들의 죄를 사하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함이다.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세례를 베풀면서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헤롯성전에서 대제사장은 ‘금난전권(禁亂廛權)’처럼 상품 독점권을 가지고, 제물의 값을 높게 책정해서 폭리를 취했다. 백성들의 피를 빨아 먹은 것이다.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대제사장들이 백성위에 군림하는 종교권력이 되었다. 이 사건은 루터시대에 그대로 재현됐다. 대제사장은 곧 레오10세 교황으로 대체된다. 이 시대는 어떠한가? 각자 자신은 어떠한가? 주님께서 마음의 성전에 오늘도 들어오셨는가? 배고프신 주님께 ‘작은 무화과’를 드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