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인간 자체를 둘로 나뉘었다. 속사람과 겉사람이다. 모든 인간은 속사람+겉사람으로 되어있다. 육신을 본다면, 겉피부와 속내장으로 되어있다. 겉과 속, 앞과 뒤가 있다. 그와 같이, 인간은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되어있다. 둘은 서로 다른 독립성을 가지는데, 동일한 사람이다.
동전 앞면에 해당하는 겉사람은 보여지는 모든 육체다. 동전 뒷면에 해당하는 속사람은 영적인 속성을 가진다. 영적인 속성은 물질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속사람은 무슨 영향을 받을까? “믿음” 즉, “마음과 생각”의 영향을 받는다.
성직자가 거룩한 의복을 입고, 거룩한 장소에 있으면서, 거룩한 음식을 먹고, 거룩한 행위로서 ‘금식기간’을 보내면서, 거룩한 기도생활을 행할지라도, 그것은 영혼에 어떤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육신에게 영향을 미칠 뿐이다. 영혼에 도움이 되는 것은 “말씀”이다. 영혼은 말씀으로 산다. 성경말씀을 믿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 그것으로 영혼이 살아난다.
성경말씀 자체는 ‘겉사람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성경을 지식으로 통달한다면, 그것이 영혼을 살리지 못한다. 지식은 “진리”를 담는 언어그릇일 뿐이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성령이 직접 내면에 들어갈 때, 그 영혼이 살아난다. 성경말씀과 성령은 독립적이다. 성경말씀의 지식을 섭취할 때, 그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이 되려면, 성령의 누룩이 들어가야한다. 성령의 숨결은 실존한다. 아모스 선지자가 말한 “영적 기갈”은 성경지식의 빈곤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징벌이다.
성경지식이 산처럼 높아도, 하나님께서 침묵하면, 성경지식은 ‘지식’에 불과하다. 루터가 로마 교황청과 대적할 때, 성경지식에 있어서는 로마 교황청 소속 추기경이 높았다. 성경지식은 ‘겉사람의 옷’에 해당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속사람의 옷’에 해당한다. 계시록에 나오는 ‘흰 옷 입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신칭의를 입은 자들이다. 하나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의롭게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최초 금지명령을 내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다. 성경학자들은 “선악나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물론, 그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담에게 주어진 것이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이 주어졌다. 그 말씀대로 아담과 그 후손은 “죽음의 사망”이 임했다. 그것이 “죄의 사망”이다. 그래서,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그 사망”을 죽인 것이다. “그 사망”은 “말씀으로 성취된 아담의 영적 죽음”이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은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2가지 선택사항이었는데, 아담은 “먹는 것”을 택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담에게 “죽음”으로 성취되었으니, 그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담과 그 후손에게 “사망의 말씀”으로 덮친 것이다. “사망의 말씀”이 곧 “율법”인 것이다. 겉사람과 관련된 것이 절대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지만, 속사람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속에서 추방당했다.
말씀이 ‘사망으로’ 성취된 아담과 그 후손에게 ‘생명의 법’이 나타날 때까지 ‘죄’가 권세를 잡는다. 아무리 도덕적 행실을 하더라도, 수백개의 선악과를 따먹지 않더라도, 속사람은 살아날 수 없다. 아담과 하와가 영적 죽음을 맞은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그 말씀을 행했기 때문이다. 말씀이 속사람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말씀은 영혼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