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장에는 세례요한이 죽고, 장사지내고, 예수님께 전해진 사건이 나온다. 민족의 큰 어른이 운명하셨고, 정치의 종교탄압이며, 백성들에게 슬픈 뉴스였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지자의 입을 막는 것은 분명 옳지 않다. 주님은 정치탄압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았다. 침묵하셨다. 11장에서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셨는데, 14장에서 헤롯의 정치탄압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
빈들이다. 저녁이 됐는데, 갈 곳이 없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기다린다. 분명 배가 고플 것인데, 오병이어(五餠二魚) 밖에 없다. 어떤 아이의 저녁밥일 것인데, 주님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하셨다. “내게 가져오라”고 하셨을 때, 이미 기적은 시작됐다. 주님은 오병이어를 놓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세례요한이 죽고, 절망이 엄습할 때, 좌절할 것 없다. 주님께 가면 된다. 주님께 가면, 주님은 오병이어를 놓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 제자들은 그것을 무리에게 주고,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넘치게 담을 수 있다. (이 사건은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첫 만남을 연상시킨다.)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데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왕상17:11)
엘리야는 까마귀가 가져온 ‘떡과 고기’를 먹고 살았다. 예수님도 ‘떡과 물고기’의 오병이어(五餠二魚)를 가져오게 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주님처럼, 오병이어(五餠二魚)를 놓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고, 떡을 떼며, 기쁨으로 기도하고, 함께 나눠서 먹어야한다. 그것을 흠향한 하나님께서 오병이어를 만병만어(萬餠萬魚)로 만드실 것이다.
주님앞에 “오병이어”의 약함을 인정해야한다. 인정하면, 그때 주님께서 창조의 능력을 행하신다.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도,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다.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약속했다. 주님을 따라 가면, 주님께서 만드시고, 창조하시고, 구원하신다. 사람이 할 일은 ‘주님을 졸졸졸 따라가기’다. 그런데, 머리가 크면, 주님을 따르지 않고 곁길로 빠진다. 그 길은 구부러진 길이요, 비뚤어진 길이다. 진리는 성경말씀이다. 그래서 나는 성경원문 읽기에 집중한다. 신앙서적은 참고서일 뿐이다.
요한복음 21:10에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4:7에서도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셨다. 주님께 가져가면, 기적이 일어난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주님께 드리고, 영생의 우물을 선물로 받았다. 오!! 놀랍다!! 주님께 인생을 바친 베드로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
주님은 ‘저주의 십자가’로서 ‘구원’을 창조하신 분이다. 십자가를 구원의 증표로 삼으신 분인데, 어떤 인생인들 주님께 귀하지 않으리요?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측 강도의 부탁도 외면하지 않으셨다. 우측 강도 역시 ‘오병이어’와 같았음이여!! 주님께 드리면, 주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다.
내 삶, 충분히 오병이어다. 인생, 오병이어(五餠二魚) 외에 무엇이 필요하랴! 떡 다섯, 물고기 둘, 그것으로 충분하다. 낮은 곳에 마음을 두니, 성경 몇 구절에서도 마음의 평안이 찾아온다. 때론,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는 그 구절에서도 주님의 음성이 느껴진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