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서 주님은 많은 병자를 치료하셨다. 베드로의 장모 열병을 치료하고, 중풍병자를 고치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38년된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자를 구출하고, 못 듣는 벙어리가 듣고 말하게 하고, 바디매오 맹인을 보게 하고, 혈루증 여인을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주님은 분명 각종 불치병을 치료하신 능력의 의사다.
주님은 공관복음에서 마태를 전도하면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셨다. 죄인은 곧 병자다. ‘죄’가 ‘병’에 비유됐다. 왜냐면, 마태가 전도될 그 때 그들은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었다. 세리들은 돈도 많이 벌었으니, 육체적 건강은 불보듯 뻔하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향해 “병자”라고 비유했다. 심령이 병든 자들이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영혼의 병은 어떻게 치료할까? 의사들은 칼을 가지고 직접 수술하고, 약을 투여한다. 주님은 인류의 병을 어떻게 치료하셨을까? 낭만닥터 김사부2를 보면서, 나는 자주 ‘의사로서 주님’을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이 갖고 있는 각종 병은 로마서 1장, 마태복음 15:19에 나온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덕질과 거짓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마15:19)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1:28~32)
주님의 치료법은 ‘흡입’이다. 죄가 짐이면, 그 짐을 대신 짊어졌다. 그처럼, 병균을 대신 가져가신다. 이것이 이신칭의(以信稱義) 개념이다. 주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의 죄는 주님에게 간다. 건강한 자는 의사가 필요없다. 아픈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주님은 아픈 자의 ‘병’을 대신 가져가심으로 병자를 고치신다. 곧, 마음의 병이다. 이것이 ‘담당’의 치료법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 열병을 고치시며, 그 열기를 옮겨서 담당하셨다. 주님은 그날 몸살로 앓았으리라. 고침받은 여인이 그래서 주님을 수종들었다. 주님과 여인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여인을 고치고, 주님은 아프시다. 혈루증 여인을 치유하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마태는 ‘이사야 53:4’을 인용해서 증거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마8:17)
이어, 이사야 53:5~6을 보면, 주님의 치료법이 상세히 나와있다.
[이사야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최초 인류,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사망에 이르는 병’에 중독됐다. 뱀의 맹독에 물린 것이다. 그때 생긴 증세가 ‘공포’다. 마음에 두려움이 임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 때문이다.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셨고, 또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16:33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다.
사망과 사망에 대한 공포심은 인간의 무서운 고질병이다. 그것은 저주였다. 십자가의 저주는 곧 사람의 죽음이요, 사망이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은 우리의 병, ‘사망’을 친히 담당하시고, 대신에 하나님의 생명,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다. 에덴동산에는 사망에 이르는 선악나무가 있고, 생명을 주는 생명나무가 있었다. 주님은 친히 사망을 담당하시면서, 대신에 자신이 갖고 있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19:30)
예수님의 영혼, 곧 하나님의 생명이 떠나심으로 어디로 가셨을까? 바로 십자가 밑에 있던 다섯 제자들속으로 부어졌다. 또한, 부활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22)
주님은 우리의 사망을 담당하시고, 신적 생명을 대신에 주셨다. 그 증거가 ‘십자가’다. 우리는 본래 ‘사망의 병’에 걸렸다. 그런데, 주님께서 ‘사망’을 십자가에서 죽였다. 우리의 사망은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혔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는 주님과 함께 이미 죽고, 묻혔으니, 이제 주님과 함께 부활해서 영생한다. 육체의 죽음은 ‘잠’에 불과하고, 영생한다.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완전히 치료하시고,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셨다. ‘영생’은 사망을 치료한 후 얻은 ‘건강’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니,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달리타쿰!! 하시니 소녀가 일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주님께서 친히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셨다. 죽은 소녀처럼 주님이 죽고, 나사로가 있던 무덤속에 주님이 누우셨다. 나사로가 무덤을 나오고, 소녀가 죽음의 잠에서 깨어난 것은 남녀노소 누구나 주님을 믿으면, 주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사망을 이긴다는 약속이다. 사망은 우리에게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다. 단지, ‘잠’에 불과하다. 주안에 있는 모든 자는 평안할지라.
의심병에 걸린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다. 8일후, 도마도 함께 있던 제자들의 모임에 주님이 나타나셨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니,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 주님앞에 서니, 도마의 의심병은 그냥 치료됐다. 못자국과 옆구리에 손을 넣지 않고도 이미 치유됐다. 그래서 주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다. 안 보고, 주님을 믿는 자들은 복되다. 모든 불신과 의심은 십자가로 넉넉히 치유된다. 도마가 고침받은 대표환자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막14:33~34)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마26:37~38)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신 주님은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다. 십자가의 죽음이 엄습한 것이다. 나는 살면서 이런 우울증에 엄습할 때마다 십자가 밑에 가서, 주님께 토로한다.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 죽으셨고, 나를 대신해 고민하셨고, 나를 대신해 우울하셨고, 나를 대신해 슬퍼하셨으니, 이 슬픔과 고통과 우울과 아픔을 가져가달라고 간구한다. 사람에게는 내 슬픔을 호소하면, 들어주지 못했다. 그러나, 주님께 가서 내 고통을 호소하면, 십자가의 그늘 밑에서 주님은 내게 기쁨을 주셨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광풍은 성령의 바람,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으로만 치료가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요동치는 내 마음의 갈릴리 바다에 주님이 오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