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금일의 말씀 주제는 ‘대화로 풀어라, 풀어야 화목하게 된다’였다. 드라마를 보는 목적은 감동과 사건의 은유속에 삶의 깊은 성찰을 얻고자 함이고, 예배에 참석하는 목적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이다. 집중하려고 몸부림치는 하루의 삶이다.
대화(對話)는 상대해서 말한다는 의미다.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어울려서 말하는 것이다. 기업체에서 회장을 중심으로 직원들이 모여 대화하는 것은 ‘회의’(會議)이고, 함께 모여서 의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는 그것과 많이 다르다. 1:1로 서로 대등한 관계로서 말하는 것이다. 자기 것은 숨기고, 상대에게 말하게 하는 것은 진정한 대화가 아니다.
깊은 대화는 서로 진정성으로 임하는 것이다. 내가 숨기면 상대도 숨긴다. 포커 페이스가 있는 이유는 ‘속임수’와 ‘모사’와 ‘거짓’의 점철 때문이다. 노름판과 같은 정치현실에서는 ‘진정성’이 때론 어리석은 고집으로 치부된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스스로에게 진정성있게 살지 못하고, 상대에게 진정성있게 살지 못한다면, 대화도 불가능할 것이다.
얼마전, 나에게 제보를 하겠다고 전화가 왔었다. 이것 저것 따지듯 나에게 묻는데, 몇 번이고 내가 진정성있게 말을 해도 상대는 자신의 신분을 익명으로 감추고서, 속마음을 말하지 않았다. 감추면서 나에게 뭔가를 알아내려는 수작임이 느껴졌다. 과연 그러한 감춤속에 어떤 진정성있는 대화가 가능할까?
어제, 굿와이프 드라마에서도 전도연과 유지태가 서로 진정성있는 대화를 나누자가 했지만, 유지태는 속마음의 비밀을 감추고서, 논리적으로 맞는 말들로 표현하자, 전도연은 ‘감추고서 말하는 것’은 피곤하다고 일어나버렸다. 대화는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서로 느끼는 것이다. 자신이 뭔가 감추면 상대방은 금방 눈치로 느낀다.
화목(和睦)은 기쁠 화(和)와 화목할 목(睦)의 합성이다. 기쁠 화(和)는 벼와 입이 합해진 글자로서, 밥을 먹으면 기쁘다는 의미다. 동양과 서양, 아이와 어른 모두가 밥을 먹으면 기쁘다. 밥을 먹는 것은 첫째, 함께 어울러지는 것이고, 둘째 에너지를 섭취하는 것이고, 셋째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이다. 목(睦)은 눈 목(目)과 언덕 륙(陸)의 합성이다. 웃음이 깊어지면, 눈밑에 언덕이 생긴다. 진짜 웃을 때는 눈이 작아지면서 언덕이 깊게 패인다. 얼마나 아름다운 웃음인가?
웃어야 기쁠까? 기뻐야 웃을까? 나는 후자에 동의한다. 기쁨이 있어야지 웃는 것이다. 기쁘지 않은데 웃게 되면, 그것은 가식이며, 위선이며, 우울증의 전조현상이다. 날마다 TV에 출현하면서 웃던 연예인이 갑자기 자살을 하는 이유는 우울증이 웃음으로 치료되지 못한다는 극단적인 반증이다. 우울증은 외부의 웃음으로 치료할 것이 아니라, 우울증을 발생하는 근본의 뿌리를 제거해야한다. 이것은 내면의 깊은 자아 정체성의 문제이다.
어쨌든 오늘의 말씀에서는 ‘맺힌 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사라지고, ‘맺힌 것’(恨)을 서로 풀어야만, 진정 기쁠 수 있다고 했다. 맺힌 것은 곧 죄(罪)를 의미한다. 죄(罪)는 새가 그물에 잡힌 모습으로서, 사람이 크고 작게 법을 범한 것이며,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지 못한 많은 사건들이다.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하나님과 풀고, 사람과 얽힌 문제는 사람과 풀어야한다.
우울증(憂鬱症)은 근심이 가득해서 막혀버린 증상이다. 울(鬱)은 ‘막힘’으로서, 술단지를 숲속 깊은 곳에 묻어놓은 모습이다. 깊고 깊은 땅속에 술단지를 묻으면, 술이 잘 익겠지만, 술단지 입장에서는 ‘암흑’속에 갇혀서 지내는 기분일 것이다. 우울증은 바로 ‘갇힘’과 ‘막힘’의 불통증상이다. 소통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곧 우울증으로 나타난다. 대화는 화목을 낳고, 단절은 곧 우울증을 발생시키는 것 같다. 폭포수같은 화목의 주제속에서 좀 더 깊고 진지한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