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언론인으로서 ‘정의와 진실’의 공익을 수호하겠다는 신념을 품었던 나의 첫 마음은 산에서 철철철 흐르던 물이 어느 계곡의 웅덩이에 멈춰서 사실 상당히 흐려진 부분이 없지 않다. 이것은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독수리가 40년의 날개짓을 하고,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위해 고독한 시간을 보내면서, 새로운 날개와 새로운 발톱과 새로운 부리로 태어나 30년의 시간을 더 연장하듯, 전문가의 경륜이 빛을 더 발하기 위해선 스스로 겸허해질 침묵과 고독과 자성(自省)의 시간이 필요함을 얼마의 고된 시간을 보내면서 체휼했다.
나는 솔직히 인정한다. 장애물이 앞에 닥쳤을 때, 그것이 나에게 걸림돌처럼 덤비는 것 같아도, 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처럼 결국 나에게 유익이며, 나에게 뜀의 삶을 살게 하며, 돌아보면 모두 나에게 필요했던 일들이다. 지적의 비수는 독약(毒藥)처럼 느껴질 뿐, 피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드리면, 환자를 수술하기 위한 의사의 애처러운 칼날일 수도 있음을 나는 인정한다. 날카롭다고, 나에게 아프다고, 무섭다고, 그것이 나에게 불행은 아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처럼.
언론인들이야말로 가끔 달콤한 빛깔로 덮여진 유혹에 자주 노출될 수 있다. 초심(初心)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해당 기사를 작성함에 있어서, 왜 그 기사를 작성하는지, 왜 실체적 진실을 알려고 하는지, 깊게 따지면서, 그 기사를 작성하려고 했던 그 첫 마음이 취재가 완료되어, 반대편 취재원까지 만나서, 보도가 완료되기까지, 어떤 사익(私益)을 추구하길 거부하며, 공익의 수호자가 된다면, 그 기사에 있어서 취재기자는 공익의 수호자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기사는 사실확인 저널리즘의 반석위에 놓여진 건축물과 같아서, 언론중재위원회와 각종 명예훼손에 의한 법정 소송의 폭풍우가 밀려와도 견고할 것이다. 그러나, 사익이 동반된 공익이라는 기사였다는 정황이 만약 포착된다면, 그 기사는 모래위에 쌓여진 것이 될 수도 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는 ‘사마귀의 뒤통수’라는 뜻이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고, 참새는 그 사마귀를 잡아먹으려고 사마귀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다는 뜻이다. 참새의 뒤통수에는 사냥군의 총구가 놓여있었다. 중국의 장자가 했던 말이다.
언론인은 어떤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려고 사건을 파헤치거나, 그 사건의 관계자를 만나려고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 언론인에게 문을 열어주는 이유는 오직 하나, ‘국민의 알권리를 위한 공익의 수호’ 때문이다. 언론인이 그 사건만을 쳐다볼 때, 언론인은 반드시 자신의 뒤통수에서 누군가 노려보고 있음을 인식해야한다. 과연, 언론인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듯, 요즘은 전화통화 녹음과 대화녹음까지 이미 공개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그 어떤 것도 비밀은 없다. 투명한 유리문안에 언론인은 있다고 여기고 취재활동을 해야한다. CCTV가 언론인의 뒤통수에 찍히고 있다고 생각하면 ‘당랑재후’(螳螂在後)의 위험을 훗날 피할 수 있다. 누군가 보고 있다면 과연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누군가 보고 있어도 할 수 있는 떳떳한 일이라면, 그 일을 해도 된다. 누군가 보고 있다면 할 수 없는 일이라면, CCTV에 찍혀서 그 사건이 자신의 뒤통수를 덮칠 수 있음을 언론인은 자각해야한다. 언론인의 자유로운 취재활동은 ‘권리남용’의 유혹에 쉽게 노출되므로, 스스로 그것을 조심해야한다.
요즘의 정국도 알고보면 ‘비밀주의’가 망친 것이다. 국민 모두가 알게 되어서, 너무 엄청난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니, 국민들의 마음이 냉랭해지면서 결국 레임덕보다 무서운 탄핵의 핵무기가 청와대를 겨눈 것이다. 물론, 특검이 아무리 청와대 압수수색을 하더라도 청와대안에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1년의 임기가 멈춰버린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총체적 난국이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지 않았을 것이다.
표창원 의원의 경우도 동일하다. 의원으로서 당직자격 6개월 정지(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판결을 받았다. 민주당 의원으로서 탁핵에 가까운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표창원 의원이 허락한 국회 전시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풍자 누드가 논란이 되어서 그렇다. 누군가를 비판할 때는 자신도 똑같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반드시 숙지하고서 빙판길을 걷듯, 당랑재후의 CCTV가 보고 있음을 믿으면서 살아야한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로서 비판하길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내 자신이 알몸이 되어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길 스스로 자성의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에 대한 비판에 앞서, 내가 나에게 떳떳하다면, 양심의 거울앞에서 내가 진실하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인생의 얼굴이 있을까? 누군가에 해당되는 그 일이 바로 나에게 해당되고, 적용될 수 있음을 나는 겸허히 받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