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한문칼럼]
“부끄러운가?”
부끄럼을 모르는 것은 사람의 자격 상실이다. 부끄러움은 아는 것이 정상이고, 모르는 것이 비정상이다. 그런데, ‘부끄러움’의 의미가 매우 부정적이다보니,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문화가 부끄러워서 ‘잘못을 덮는’ 잘못된 문화가 형성되면서, 정말로 부끄러운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지 못하는 황당한 사건이 빈번하다. 사람이 나무가 아닌 이상, 부끄러운 행위는 부끄럽게 여겨야한다. 그것이 사람의 양심(良心)이다.
양심(良心)은 좋은 마음이다. 양호(良好)하다는 것은 좋고 또 좋다는 반복표현이다. 그처럼 양심은 좋은 마음이다. 좋은 벗은 자기 말을 들어주고, 자기의 단점을 보호하면서도 잘못을 스스로 알도록 슬며시 깨우쳐준다. 벗은 좋은 친구다. 그처럼 좋은 마음은 나의 ‘내면 벗’이다. 해가 지면, 벗도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나도 나의 집으로 돌아오는데, 남는 것은 나와 내면의 나(벗)밖에 없다. 글쎄, 화장실까지 졸졸졸 따라오는 내면의 벗은 심장처럼 귀중하다.
부끄러울 치(恥)를 보면, 귀(耳)와 마음(心)으로 구성된다. 사람도 마음이 있는데, 귀도 마음이 있다는 의미다. 귀가 심장을 가지고 느끼는 것, 그것은 두근거리면서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부끄러운 마음이다. 이것은 매우 정상적인 본능이며, 감정의 흐름이다. 잘못을 잘못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물론 잘못을 원천적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겠지만, 잘못을 행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부끄럽게 여겨야 다시는 그런 일의 재발(再發)을 방지할 수 있고, 사태를 키우지 않을 수 있다. 탄핵(彈劾)이 어디 정치용어던가? 절교(絶交) 퇴학(退學) 학폭위, 카톡왕따, 언어폭력, 가출(家出) 모두 탄핵의 동종(同種)이다. 생활속에서 탄핵받을 짓을 하지 말아야한다. 그러려면, 恥를 기억해야한다.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아야겠지만, 했다면 그것이 부끄러운 일인 것을 스스로, 상대에게 진정 인정해야한다. 그것이 사태를 그 시점에 멈추게 하는 지름길이다. 부끄러우면, 귀가 벌겋게 된다. 그것이 정상이다. 무서운 것은 부끄러운데, 귀가 벌겋게 되지도 않고, 오히려 잘한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말주변이 좋거나, 그럴듯한 언변으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은 결국 꼬리잘린 도마뱀처럼 동굴에 갇힐 뿐이다. 자신은 탈출했다고 자랑하겠으나, 그 순간 양심은 갇혔다. 내면의 벗이 갇히고, 육체의 나는 풀려났으니, 혼자 있을 때 괴로운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내면의 벗이 갇혀서 괴로운 것이다.
恥(치)와 비슷한 글자가 取(취)가 있다. 아주 옛날에 둘의 발음은 아마도 ‘치’로 동일했을 것이다. 나의 추측인데, 거의 맞을 것이다. 그 이유는 耳가 동일하므로 비슷하게 발음하는 것이 사람의 언어습관이어서 그렇다. 문자를 쓰고서 누구나 쉽게 읽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세월을 거치면서 恥와 取는 발음이 약간 달라졌다. 훈민정음(한자 발음기호)을 기점으로 달라졌을 확률이 높다.
取는 취하다(得 take)의 의미를 갖는다. 취득(取得)은 소유한다는 뜻이다. 귀(耳)와 오른손 우(又)가 합쳐져서, 취하다는 뜻이 되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내가 학생이었던 그 시절 숙제를 안하면 교사가 내 귀를 잡아당겼다. 取가 딱 그 모양새다. 어찌나 아프던지….. 요즘은 학생인권이 존중되어서, 이런 일은 거의 없다. 전쟁의 시대, 한반도가 삼국~조선으로 넘어오던 시기, 식민지 치하시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진나라, 송나라, 원나라, 청나라, 중국으로 넘어오던 시기까지, 전쟁을 하면 적군의 포로를 잡고서 귀를 잡아당겼다. 그 이유는 귀가 공적으로 증명되어서 그렇다. 일본에 있는 이총(耳塚)이 바로 적군의 귀무덤이다.
적군을 잡았다는 표시로 귀를 제출하되, 한쪽귀만 제출하게 했는데, 양쪽 귀를 제출하고서 2명의 포로로 계산을 하자, 코를 증거로 제출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비총(鼻塚)이 바로 그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시대를 살았는지, 지금 우리는 진정 감사해야한다.
‘들음’의 가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 생각해야한다. 우리가 만약 상대의 옳은 말을 듣지 못하면, 귀가 있으나 없는 것과 같다. 귀를 잃은 것과 듣지 못하는 것은 동일하다. 귀가 있는 목적은 바른 말을 들으라고 한 것이다. 恥는 상대의 비판을 듣는 것이다. 자신이 분명 잘못하고 있는데, 그래서 상대가 그것을 알려준 것인데,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친구를 오히려 적으로 매도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친구의 좋은 의도까지 배척하면, 자신 스스로 자신의 귀를 베는 것과 다를 바 없다. 取가 일어난 것이다. 귀가 있어도 들을 귀가 없으니, 상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항상 마음의 귀를 기울여야한다. 恥가 바로 마음의 귀다. 부끄러움이 스스로 있는지, 없는지, 항상 자신의 양심을 거울처럼 닦아야한다.
적에게 귀를 뺏기지 않듯, 상대의 말에 정말로 귀 기울여서 듣는 연습을 자주 해야한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것은 이치가 간단하다. 듣지 않고 말하는 것은 의사소통의 기본구조를 모르는 것이다. 그 무엇이든, 듣는 것이 먼저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엄마가 ‘엄마’라고 하니까, 들어서 ‘엄마’라고 한 것이다. 들음이 곧 말함으로 나타난다. 귀가 열려있고, 2개인 이유는 들어보라는 것이다. 치우치지 말고 상대의 말을 균형적으로 들어보라는 의미다.
염치(廉恥)는 겸허함과 부끄러움이다.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때, “염치 불구하고”라고 양해를 구하게 된다. 상대를 미안하게 했는데 미안한 마음이 없고, 당연한 요구로 생각하면, 그 사람은 파렴치한(破廉恥漢)이라고 한다. 부끄러움을 파괴한(破) 사람을 의미한다.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도 두꺼운 얼굴이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이다. 철판처럼 두꺼운 얼굴은 곧 자신이 자신의 행동과 언어를 못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일기를 쓰는 것이며, 하루의 삶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상대방의 불편한 마음을 유추하면서 인생의 깊이를 나무의 뿌리처럼 뻗어내리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그 순간,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상대탓을 하는지, 자신탓을 하는지, 곰곰이 따져보면 양심의 상태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