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장창훈 기자]=부활은 죽음에서 출발한다. 새로움은 옛날을 전제한다. ‘gone’(없어졌어요) 제목의 회고록을 냈다는 김민진씨는 세계적 바이올리니트스이며, 21억 상당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도난당해 국제뉴스에 올랐던 인물이다. 도난당한 바이올린은 되찾았으나, 그녀의 인생은 충격이 컸다고 한다. 조선일보 2017.5.4. 윤희영의 news english는 김민진의 회고록을 주제로 세세히 다루었다.
바이올린의 실종은 시간의 상실로 이어졌다. 뉴스보도에는 ‘21억원 바이올린 도난’으로 표시되었으나, 사람은 사연으로 엮어 있다. 그녀에게 그 바이올린은 특별한 의미로 묶여 있었다.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발에 묶어둔 것’은 ‘사연의 상징성’일 것이다. 나에게 나의 노트북이 그러하고, 나의 책들이 그러하다. 성경에 좋은 진주를 발견한 상인처럼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샀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것이 투자되었으니 그 상실감이 모든 것을 잃은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윤희영씨의 글에서는 15년 가까이 절망의 수렁에 빠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5’년 또는 ‘2015년’의 잘못된 표기일 것이다. 도난당한 때가 2010년이다. 예술하는 사람들은 감성이 예민해서 사소한 사건도 의미로 재해석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글쓰는 나도 창문에서 까치가 울면 의미로 기분이 좋아지고, 까마귀가 내가 가는 방향에서 깍깍 하면 기분이 의미로 불쾌해진다. 실제로 불안한 일이 발생하면 까마귀는 언제나 적신호로 내 앞에 출현할 수 밖에 없다. 사건과 상황은 복잡하게 발생하지만, 그것을 목격한 사람은 코드로 인식할 수도 있다.
피아니스트도 바이올리니스트도 작가도 결국 악기와 펜을 잡고서 예술을 연주하고 글을 남기듯 그 인생 자체도 악기로 연주된다. 김민진씨가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도난당하자 상실의 고통이 자아정체성까지 침입했다고 하니, 신체를 절단당한 심적 통증일 것이다. 도난당한 바이올린을 되찾았어도 잃어버린 3년의 시간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나는 음악을 몰라서, 시나리오 용어로 표현하면 갈등이 극에 달해서 주인공이 추락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성경적 용어로는 예수님의 골고다 사건이 발생했고, 십자가의 상실은 3일의 절망이후 부활이 재현된다. 인생이 행복한 것은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은 것이다. 김민진씨 사연을 가만히 읽으면서 ‘gone’의 제목에서 과거와 단절, 남은 여생의 새로운 출발이 강하게 느껴졌다. ‘gone’을 스스로에게 선언하기 위해 얼마나 큰 결단의 선언을 내려야 했겠는가?
“왜 내가 그때 샌드위치 가게에 들렀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과거의 반복은 심리적 갈등에서 자주 발생한다. 내적 갈등은 날파리 같다. 윙윙윙 소리는 나는데 실체는 없는 무형의 먼지들…. 날파리는 무의미한 것의 상징이다. 과거는 후회하려고 존재하지 않고, 현재를 투영하려고 생각나는 것이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하듯 과거의 고통은 현실을 더 빛나게 한다. 단, 달라졌을 때를 전제한다. 2010년 이후 연주활동이 거의 없었는데 ‘gone’을 기점으로 새로운 예술세계를 펼친다고 하니, 인생의 연주는 ‘상실의 비극’에서 끝나지 않고, ‘상실의 극복’으로 흐르고 있다.
사연은 소유에 있지 않고 내면에 존재한다. 의미는 내면의 영역이다. 소설 황금방울새(도나 다트 장편소설)의 주제이기도 하다. 황금방울새가 도난당했으나 도난당한 사실조차 모르고 황금방울새를 돌돌돌 뭉친 상자를 보관하며 의미의 주춧돌로 살아간 그 주인공처럼. 의미는 내면에 내재한다. 상실은 망각의 드러남이다. 피카소를 그 작품으로 기억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예술가들도 존재한다. 잊혀짐은 모두의 기억에서 도난당한 것이다. 살아있는 시간에 사람은 생장점을 현실에 두는 것이 타당하다. 활은 활줄에 놓듯 연주는 현실의 감각에서 흐르는 것이다. 김민진씨가 거대한 충격의 늪에서 새로운 부활의 연주자가 되어 출현한 것은 뜻밖의 행운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