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창훈 수필]=가끔,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바람처럼 소리는 공기매체를 통해 전달되므로, 고막은 그 소리를 인지한다. 빛으로 7분 거리에 존재한다는 저 태양이 진공 너머로 지금 여기 전달되듯, “아니야~~~”라는 어떤 여대생의 목소리, 그건 텍스트가 아니었다. 관찰자로서 ‘아니야’는 하나의 형상이었다. ‘맞다’는 어떤 표현의 구체적 형상이다. 말을 하면서 몸짓, 표정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말 자체에도 표정과 몸짓과 각종 색감과 색조까지 존재함을 실감한다. 누가 부정하랴!!! 텍스트를 읽는 것보다 노래하는 것이 즐겁다는 ‘사실의 존재’에 대해.
가끔, 나는 생각한다. 개도 귀가 있고, 코끼리는 사람보다 귀가 더 크고, 호랑이는 입이 사람보다 더 클 뿐만 아니라, 소는 그 눈이 얼마나 크던가? 동물은 대부분 사람과 비슷한 ‘귀눈입코(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어를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동물 보호론자는 분명 개가 말귀를 알아듣는다고 우길 수도 있겠다. 자식은 말을 안듣지만, 애완견은 졸졸졸 꼬리를 치면서 주인말을 들으니, 말귀를 알아듣는 것은 애완견이라고 고집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개는 말을 만들지 못한다.
언어의 위대함은 별들의 수놓음처럼 경건하다. 밤하늘에 펼쳐진 찬란함은 사람의 존재를 먼지로 만들어버리며, 거룩함속에 인생은 무존재가 되버린다. 얼마전 조선일보 3만호 언론보도가 있었다. 펼치면 달나라까지 도달할 길이라고 하니, 모든 종이매체를 종합하면 태양까지 도달할 수도 있겠다. 언어는 모든 생물체를 담고 있는 지구처럼 정보를 담는 그릇이다.
그런데, 우리는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할 수 없듯이 동시에 2가지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도서관과 교보문고에 수많은 책들, 우리는 오직 1권 책을 선택해서, 400p가 넘는 분량에서 1p, 1줄의 문장에 반응하는 존재이다. 1문장도 아니다. 1개의 단어를 1초, 1초 읽어서 그 의미를 읽어나가며, 10초 후에는 앞의 문장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붕어의 기억력이 5초라고 하지만, 기억의 메모리는 본래 그런 속성이다. 붕어는 ‘붕어붕어’ 말을 못할 뿐, 단순 기억력은 사람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 많은 정보를 정확히 기억한다면, 사람은 용량 초과로 폭발할 수도 있다. 지워지면서 새로운 기억이 덮이는 것이니, 이 또한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집중!!! 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새소리처럼 들려오는 까페 음악소리는 나의 생각을 가로챈다. 어쩔 수 없는 기억의 열림이다. 집중한다는 것은 ‘하나의 생각’을 붙드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헤어 디자이너가 3명이고, 손님이 5명이면, 2명은 기다려야한다. 각각 1사람이 1명의 머리를 만질 수밖에 없다. 나의 머리에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는 내가 결정하며 생각이 진행된다. 오늘은 어떤 생각을 붙들고, 나의 삶을 살아갈까? ‘아니야~~~’라고 들려오는 어떤 여대생(내가 보기에) 목소리속에 입체감이 느껴지면서, 언어의 위대함을 재발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