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리더 : 김소현
기록리더 학교 : 대일외국어고등학교
취재장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
1. 취재 동기
부모님과 함께 도봉산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도로 오른편에 정의공주 묘역이 보였습니다. 부모님에게 물어보니 세종대왕의 딸이라 했습니다. 보통 역사책에서 왕자에 대한 기록은 있어도 공주에 대한 기록은 잘 접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의공주에 대해 사전 조사를 하고 오늘 정의공주 묘역에 왔습니다.
2. 문화재 취재 내용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 / 시대 : 15세기 후반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63번지 1호
이 묘역은 양효공 안맹담과 그의 부인 정의공주를 합장한 곳이다. 이 묘역의 봉분은 쌍분이고, 신도비, 묘표 2기, 상석 2기, 문인석 2쌍, 3단 계체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다. 양효공의 본관은 죽산으로 함길도 도관찰출척사 안망지의 아들이다. 1428년(세종 10)에 14세의 나이로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결혼하였는데 부부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한다. 세종은 그에게 한강 가운데 있는 저자도와 낙천정을 하사하였다. 그는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하였다. 묘역의 묘표 2기는 쌍분 앞에 있어 정의공주가 왼쪽에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표의 관석에는 여의두문과 운문을 새겼는데 이는 조선 초기 일부 묘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1466년(세조 12) 묘소 동남쪽 아래에 신도비를 세웠다. 정인지가 비문을 지었고 안맹담의 4남 안빈세가 비문과 전액의 글씨를 썼다. 비는 이수, 비신, 귀부로 되어 있다.
정의공주, 안맹담과 결혼하다
정의공주는 세종의 둘째 딸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세종은 소헌왕후 심씨로부터 8명의 대군과 2명의 공주를 낳았습니다. 그 중 정의공주는 둘째 딸이며, 오빠는 제5대 임금 문종이고, 계유정난을 통해 임금으로 즉위한 수양대군(세조), 계유정난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안평대군, 단종 복위계획을 시도하다가 또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이 동생들입니다.
그녀에 대해서는 비록 공주이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그녀는 세종이 즉위한 뒤 10년(1428)에 정의공주에 봉해졌고, 그해 안맹담과 혼인하였습니다. 안맹담은 고려 말 조선 초 명문 출신으로 함흥 부윤을 역임하고 함길도 도관찰출척사도 지낸 안망지의 아들입니다. 함흥 지역은 이성계의 고향이자 세력 기반이었던 곳이기 때문에 조선 왕조 건립에 일정한 역할을 한 집안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안맹담은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음악과 의학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안평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죽음을 당한 것에 반해 안맹담은 세조 편에 붙어 공을 세워 좌익 원종공신 1등에 봉해지기도 했습니다.
정의공주는 안맹담과 부부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해지며 4남 2녀를 두었습니다. 세종은 정의공주를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고 합니다. 아마 세종의 총명함을 빼어 닮아서 그랬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녀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역산’을 해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산’이란 ‘천문학과 수학’을 말합니다. 세종도 부제학 정인지에게 어려운 수학책인 “산학계몽”을 배웠고, 대군들에게도 수학을 공부하도록 했으며, 신하들에게도 중국에 가서 수학을 익히도록 했습니다.
세종은 정의공주가 시집 간 후에도 궐 근처에 살도록 하여 자주 들렀으며 부마인 안맹담에게도 남다른 관심을 쏟았습니다. 한번은 안맹담이 술을 너무나 좋아하는 것을 걱정한 세종은 안맹담의 친구들을 불러 사위와 함께 술을 마시는 일에 대해 주의를 줄 정도였다 합니다.
정의공주, 한글 창제 과정에서 세종대왕이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다
정의공주는 한글 창제에도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죽산안씨대동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
“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변음과 토착 문제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입니다. 세종 스스로가 당시 우리나라의 최고 언어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데 이 문제만큼은 혼자서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대군들에게 변음과 토착에 대해 연구 과제를 주었지만 신통치 않았답니다. 그래서 이미 시집간 딸 정의공주에게 숙제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정의공주는 아주 쉽게 풀어서 바쳤고 세종은 너무나 기뻐 노비 수백 명을 상으로 내렸다고 합니다. 정의공주의 총명함이 변음 토착 문제에서 입증된 셈입니다.
그러나 “죽산안씨대동보”에는 정의공주가 변음 토착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지금 국어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고도 하고요.
한글은 세계에서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 알고 계세요?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Geoffrey Sampson) 교수는 자신의 저서 ≪문자 체계(Writing Systems)≫에서 “한글은 의문의 여지없이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지적 산물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라고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극찬했다 합니다.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을 번역하고 해설서를 만드는 등의 작업에 참여한 것은 모두 훈민정음 창제 후의 일입니다. “대동보”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정의공주는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지대한 공을 한 셈입니다.
1462년(세조 8) 안맹담이 세상을 떠나자 명복을 빌기 위해 1469년(예종 1) 정의공주는 “지장보살 본원경”(보물 966호)을 간행했습니다. 안맹담 또한 불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477년 세상과 이별하고 남편이 있는 양주 도봉산 해촌동에 자리했습니다.
3. 보고 느낀 점
제가 읽고 참고한 인터넷 글이나 책들이 사실이라면 정의공주는 매우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변음과 토착 문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 여러 왕자들도 해내지 못한 난제를 정의공주가 간단히 해결했다는 것에 놀라움이 큽니다. 조선이 남성의 능력만 중시하지 않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나 학문 연구도 아울러 차별 없이 했다면 우리나라의 문화와 나라의 발전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지 않았겠나 생각해 봅니다.
4. 문화재 찾아가는 교통편
버스 : 간선 130번, 지선 1144번, 노원 15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