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리더 : 김소현
기록리더 학교 : 대일외국어고등학교
취재장소 : 서울시 도봉구 도봉로 123길 33-6(쌍문동)
1. 취재 동기
곧 촛불시민혁명 1주년이 된다고 합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해 준 사건이었습니다. 도봉구 문화유산을 취재하면서 함석헌 기념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집에 와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훌륭한 역할을 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한번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2. 문화재 취재 내용
함석헌 기념관은 함석헌 선생님이 본래 사셨던 집을 개조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문 왼편 바로 옆에는 ‘함석헌 가옥 서울미래유산’이라는 푯말과 함께 ‘그대는 웃으려나’라는 함석헌 선생님의 글이 있습니다. 오른편에는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함석헌 기념관’이라는 글이 인상 깊게 씌어 있습니다.
웃는 꽃 늘 웃을 듯 그대는 웃으려나 떨어질 그 생각에 난 마음 슬프오이
벗이여, 꽃을 말고서 뿌릴 가꿔 주소서
취한 술 늘 취할 듯 그대는 마시려나 깨어질 그 생각에 난 마음 쓸쓸하여
벗이여, 술을 말고서 쓸개 마셔 깨소서
고운 눈 늘 고울 듯 그대는 홀리려나 흐려질 그 생각에 난 마음 냉랭하이
벗이여, 사랑 말고서 참을 찾아 보소서
붉은 뺨 붉을 듯 그대는 아끼려나 늙어질 그 생각에 난 마음 두렵소이
벗이여, 삶을 말고서 죽음 보고 사소서
무언가 깊은 생각을 갖게 하는 시입니다.
1층 입구에 들어서기 전에 책을 펼쳐놓은 조각이 있어 봤습니다. 설명에는 ‘2006년 대전 현충원으로 묘를 이장하기 전, 연천군 전곡면 간파리에 있던 묘비’라고 합니다.
나는 빈들에
외치는 사나운 소리
살갗 찢는 아픈소리
나와 어울려 부르는
너희 기도 품고
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때면
그때는 이 나
소리도 없이
고요한 빛으로 오리라
“나는 빈들에 오치는 소리 중에서”
1층 출입구를 들어서니 벽면으로 함석헌 선생님의 일대기가 쓰여 있습니다. 오른쪽부터 차분차분 따라 가면서 읽다보면 저절로 함석헌 선생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연표 오른편 방이 함석헌 선생님이 생활하셨던 방입니다. 안내에는 아래와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공간은 함석헌이 일생의 마지막을 보내며 독서하고 집필하고 사색하던 공간을 부분적으로 재현한 곳이다. 늘 간디의 사진을 벽에 붙이고 간디의 삶과 사상을 잊지 않으려 했었던 함석헌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다독과 다작으로 일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방대한 서적과 자료가 1985년 화재로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이 방에 걸려 있는 무욕청정(無慾清淨)이라는 액자는 욕심이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노자 사상에서 따온 글로 함석헌의 친필이다.”
선생님의 방대한 서적과 자료가 화재로 다 타버렸다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무욕청정’의 의미를 깊이 새겨보아야겠습니다.
방을 나와 통로를 따라 가니 자그마한 전시실이 나옵니다. 아마 이 전시실이 거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는 함석헌 선생님과 관련된 글들이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쓰신 시 – ‘그 사람을 가졌는가’가 마음에 감동을 울립니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 위해
제만은 살려 두거라’ 알려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대에 씨ᄋᆞᆯ에게는 촛불이었던 잡지, “씨ᄋᆞᆯ의 소리”는 함석헌 선생님이 정치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발행해나가면서 민주의 글을 쓰셨던 잡지였습니다. 또 선생님은 역사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대표적 역사 관련 책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와 “뜻으로 본 한국역사” 책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세계평화가 정착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채택한 선언문 작성을 주도했습니다. 당시 서울올림픽 행사를 계기로 한국을 방문했던 해외인사와 국내인사 542명이 이 서명에 동참했다고 합니다.
안내데스크 옆의 방은 영상실로 방문객이 1명이 와도 영상을 상영한다고 합니다.
출입문을 나와 지하실로 내려가는 길목에 유리온실이 나옵니다. 선생님은 살아생전에 이곳에서 백동백 나무와 선인장을 직접 가꾸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주민 커뮤니티 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고 합니다.
지하실은 또 다른 공간입니다. 전시 공간이라기보다는 활동 공간이며 도서관의 역할도 합니다. 책을 꺼내 앉아 읽을 수 있고 빌려갈 수도 있습니다. 또 안쪽 방은 세미나실로 대여해주거나 게스트룸으로 하룻밤 숙박도 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
함석헌 선생님은 1901년 3월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한학자 함일형이 세운 덕일학교에 다니면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1919년 3·1운동 때 평양고보 연락책임자 역할을 하고 평양경찰서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만세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정주의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한글’, ‘배달’ 같은 말을 배우면서 민족의식을 키웠고,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 독립운동가 안창호, 오산학교 교장 조만식, 이 세 분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도쿄 사범학교에서는 기독교적 민족과 민중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귀국 후 ‘성서조선’을 발행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그의 역사관은 당연히 기독교 사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역사를 다원론적으로 해석함과 동시에 ‘뜻’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뜻’을 ‘씨ᄋᆞᆯ’로 표현했습니다. 씨ᄋᆞᆯ은 보통 ‘민중’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도 “너는 씨ᄋᆞᆯ이다. 너는 앞선 영원들의 총 결산이요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다. … 지난 긴 오천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역사가 민중 속에 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5·16군사 정변에 반대했고, 유신체제에도 저항하였습니다. 또 전두환 등 신군부의 독재에 맞서다가 1989년에 눈을 감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번이나 오를 정도로 민족, 민주, 인권, 평화를 애호한 사상가이자 실천가였습니다.
3. 보고 느낀 점
함석헌 선생님은 한평생 자기보다는 남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또 한평생 나라를 생각하고 인권을 생각하며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 분의 일생이 가치 있는 것은 이러한 삶의 기반에 ‘사랑’이 자리잡고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생각을 잘 반영하여 만든 것이 함석헌 기념관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화려하지 않고 권위적인 건물도 아닌 소박한 그 분의 모습이 그대로 느껴지는 곳입니다.
4. 문화재 찾아가는 교통편
■지하철 : 4호선 쌍문역(4번 출구) → 소피아 관광호텔 → 횡단보도 건너편 주택가 도보 10분
■버스 : 마을버스 1, 7번(감포면옥 앞 하차 200미터), 마을버스 5, 6번(정의여고 앞 하차 200미터), 지선버스 1126번(정의여중고 앞 하차 200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