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윤언세 학생기자]=몽유도원도, 진경산수화, 인왕제색도 우리 조선을 대표하는 그림들 중의 일부이다. 이 중에서 진경산수화와 인왕제색도는 정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선은 조선후기에서부터 지금까지도 유명한 화가이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그림실력과 서정적인 묘사로 유명한 것일 수 있지만 정선의 그림을 기술적 측면으로써 보면 기존 화가들은 중국의 기름지고 안개가 낀 듯 한 화풍을 따라하였지만 정선은 한국의 청명한 느낌과 여백의 미를 살려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였다. 정선이 한국의 미에 눈을 뜬 것은 이미 일생의 대부분을 풍광이 뛰어난 북악산 인왕산 일대에 생활했기에 우리의 미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간략한 정선의 생애
(출생~30대 중엽) 정선은 서울 북악산 아래 유란 동(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정선은 이웃에 살던 큰 문인학자 김창흡 등의 영향을 받아 서화에 매진하게 된다.
(30대 중엽~40대 중엽) 정선이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는 금강산 유람을 하고 해악전신첩을 그릴 때 부터였다. 이 화첩에는 금강산의 절경을 표현하였다. 이첩은 지금은 전해지고 있지는 않지만 36세에 그린 신묘년풍악도첩으로 30대 중엽 정선의 화풍을 짐작할 수 있다.
(40대 중엽~60세):정선은 서울, 경기, 금강산 지역 이외에도 경상도, 중청도 지역까지 널리 여행하면서 한국의 자연의 미를 그림에 옮겼다.
(60세~70세): 60대 후반에는 양천현령으로 재임하면서 부드럽고 서정적인 강변의 경치를 많이 그리게 된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힘찬 산악미와 서정적인 묘사가 더해졌다.
(70세~84세): 70세 이후 정선은 마음대로 그림을 구사해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는 자유자재의 경지에 이르렀다. 언뜻 미완성 인 듯한 파격적인 구도와 생략적 묘사가 더해졌다. 정선은 81세 때에 종2품의 관직을 임하기도 하였다. (얼핏 들은 애기이지만, 세종이 유교 사상을 반영하여 굉장히 연로하신 분들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정책이 있었다.) 1759년 84세에 천수를 다하고 도봉구 쌍문동에 안장되어있다.
이그림은 1749년 정선이 말년에 그린 사공도시화첩 중 하나안 “경건”이다. (사전적 경건의 의미는 “굳세고 튼튼함” 이다)
참고: 내가 간 겸재 정선 미술관은 정선이 60세에 양천현령이라는 관직을 임명 받았을 때 살았던 곳이 겸재 정선 미술관이 있는 곳 양천현아 이다. 정선은 이 강서지연의 뛰어난 풍광을 경교명승첩, 양천팔경첩에 담았다.
소견: 현재의 대한민국은 서구화가 진행 되어가고 있다. 그림, 노래, 문화, 기술 모두 서양의 형식으로 맞게 변해가고 있다. 점차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기분이 느껴진다. 시대가 변해갈 수록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것을 추구하고 추상적인 문화를 원하는 시대가 되어간다. 로봇이 단순노동을 대체하니 아이디어 산업, 문화 산업과 같은 수준이 높은 산업이 발달해가는 추세이다. 아직까진, 우리나라는 서구화를 따라가고 작품의 자유가 연령 제한으로 선진국처럼 보장되지 않아 개성을 잃어가고 있는 현상을 격고 있다. 개성이 중요해진 지금 이 시점에 우리는 우리만의 느낌을 찾아야 한다. 정선 또한 기존 화가들이 중국풍을 따라 그리고 있을 때 정선은 우리나라의 자연을 탐방하며 우리의 미를 찾아다녔다. 지금 이 우리나라 또한 정선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선의 그림에선 많은 걸 찾아낼 수 있었다. 유익한 시간 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