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巡禮者)는 소설책이다.
순례자(pilgrim)는 파울로 코엘료가 지었고, 세계적 베스트셀러이며, 콤포스텔라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책에서 명예자는 감옥에 갇힌 자로 비유되고,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는 자는 ‘빛나는 영웅’으로 묘사된다. 주인공은 자신과 끝없는 투쟁으로 순례길을 행진하는 내용이다. 얼마전, 나는 순례자를 만났고, 인터뷰 기록을 오늘 마쳤다.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인터뷰했던 그 스타벅스이다. 스타벅스에서 만났던 선미라 박사는 모자를 눌러썼고, 표현법이 요즘의 상식과는 멀리 떨어진 그 별빛 같았다. 별들은 밤하늘에서 살 뿐 땅에는 내려오지 못하는데, 현대사회와 어울리지 않을 순례자의 별빛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정신을 들으면서, 순례에 대한 오해를 벗기 시작했다. 내가 배웠던 순례는 ‘깊은 통찰’이다.
이러한 기법은 PD들이 잘 연출한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몰입 때문이다. 드라마의 비현실을 보면서 우리가 현실을 느끼는 이유는 PD들이 TV와 현실을 중첩시키는 ‘연출’을 해놨기 때문이다. PD의 탁월한 연출감각으로 우리는 그 장치를 눈치채지 못하면서 TV와 현실을 하나로 일체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게 배우의 연기력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익숙한 추억의 배경이 될 수도 있고, 대사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서 나의 일상을 재해석하면서 눈물과 긴장과 슬픔과 환호와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TV는 리모콘만 우리에게 줄 뿐, 우리는 TV속 드라마의 배우들에 대한 리모콘은 갖지 못한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배우들에 대한 리모콘(연출)은 PD가 갖고 있다. 이제 우리는 순례자가 되어서 현실의 일상에 대한 리모콘을 가지고서, 나와 현실을 일체시키는 그러한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순례자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경복궁을 보면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고 배우고 그 역사의 거울을 통해서 현실을 재해석하는 교육을 받는다. 순례자는 그 역사의 거울속으로 쑥 들어간다. 실제로 왕이 되어보고, 함께 고독의 궁궐을 걸어보면서 나의 현실을 점검하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곧 TV속 드라마를 실제로 연기하는 그런 사건이 나에게 발생한 것이다. 시청자가 되는 것이 감동적일까? 배우가 되어서 연기하는 것이 감동적일까? 비교해서 뭐할까?
시청자로서 감동받는 것은 문화탐방이다. 배우로서 연기하는 것은 곧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것은 연기와 다르다. 마음으로 그것을 느끼면서 교감하는 것이다. 어떤 작은 사건이라고 하여도 그것에 집중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훈련과도 같다. 밥을 굶으면서 배고픈 자의 고통을 느끼듯이, 순례자의 길은 문화와 교감, 사회와 교감, 우주와 교감에서 출발한다.
나는 ‘순례자’ 책을 정말 감명깊게 읽었다. 그 책은 말미에서 상당히 어렵기도 하고, 약간 지루하게 연속되는 느낌이 많아서 끝까지 읽지는 못했는데, 마치 그 책의 후속편을 읽는 듯한 인터뷰를 경험하면서, 일상의 삶을 순례자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깨달음의 열매를 열게 되었다. 순례자는 뭘까?
순례자(巡禮者)는 순(巡)과 례(禮)와 자(者)의 합성이다. 순(巡)은 물처럼 흘러간다는 의미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간다. 물은 막힘이 없다. 바위가 막으면 부드럽게 붙어서 유유히 흘러간다. 땅속으로 땅위로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순응하듯 흘러간다. 순례자는 물처럼 맨발로 여기저기 모든 곳을 여행하면서 살아간다. 례(禮)는 신(示)앞에 풍성함(豊)을 가지는 마음가짐을 상징한다. 례(禮)는 곧 예배(禮拜)이며, 예절(禮節)이다. 순례는 탐방, 관광과 전혀 다르다. 순례(巡禮)는 자신을 만나는 거룩한 행위이며, 하늘로 나아가는 진실한 예배이며, 사회공동체를 깨닫는 철학의 구도(求道)이다. 순례자는 곧 물의 질서를 배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순례정신으로 새로운 인터뷰 순례길을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