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드라마 칼럼]=동배의 생명이 죽음에 놓이다. 범인의 착오로 다른 사람을 죽인 것이다. 교활한 웃음을 짓는 범인은 다음 계획을 목적하지만, 결국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그 생명이 사망에 놓이게 된다. 양심의 감옥에 갇힌 자들이다. 119에 실려와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도 있지만, 인호의 실수로 격투가 발생한 것. 인호는 늘상 가족을 먼저 생각하지만, 본인이 가족이 원하는 가장이 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 가족을 위한 최선의 방책은 본인이 가족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양심회복이다.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한 것,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도 돌이키지 못하는 것, 반성하지 못하는 가면쓴 양심이 결정적 문제점이다. 본인의 수많은 지문이 묻었을 것인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범인의 흉기를 몰래 비밀 창고에 숨긴 것, 악의 인을 맞은 자들은 결코 참회의 문을 열지 않고, 변화되지도 않는다. 금은 금, 흙은 흙이다. 염소는 염소, 양은 양이다. 영원히 종은 종으로 남는다. 악인은 악인으로 변하지 않는 자들이다.
변호사를 아줌마로 부를 수 있는 편안한 관계로서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데도 시간은 부족하다. 그런데 죄에 휘말리니, 인생이 꼬인 것이다. CCTV를 통해 분석하는 경찰의 추리력은 여전히 한계에 봉착한다. 근본의 실마리를 알지 못하는 것 때문이다. 하나 남은 마취약은 누구를 죽이려는 것일까? 악을 응징하려는 선의 투쟁은 선인가? 악인가? 악을 선으로 갚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악을 갚는 복수는 역시 악일 뿐이다. 복수는 복수로서 악의 범죄만 넘칠 뿐이다. 응징은 범죄에 불과하다. 같은 악의 속성을 지닌 것. 중학교 중퇴 소년원 출신의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인생, 버려진 인생 쓰레기로 살아가는데, 정작 살인자들은 범죄자로 살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회의 딜레마. 가장 행복한 순간에 그들의 것을 뺏어 파멸하려는 복수의 응징, 복수를 하려고 하지만, 결국 복수의 도구가 되어서 악에 속한 것일 뿐이다. 그들과 같은 속성과 성질로 전락하는 추악한 짓이다. 드라마는 그러한 주제를 말하고 있다.
이 선택의 끝이 결국 어떻게 될까?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후회하는 변호사 최자혜)
자살을 권면하는 친구의 말을 들을까, 말까, 망설이는 인호. 주변 차량과 편의점 CCTV를 통해 점점 용의자를 특정해가는 경찰의 수사력.
죄는 가지지 못한 자들이 짓는 것(?) 노숙자와 빵을 훔치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흉악범. 협박의 달인이 되어서 음흉하게 음모를 조작하는 자, 결코 속아서는 안된다. 인호는 자살을 결심한다. 마지막 가족과 식사를 하고 경찰로 출두를 결심하고, 달래는 혼자서 화장실에 간다. 인호는 다른 용의자가 특정된 언론보도를 보고서 순간 다른 마음을 먹고서 원상태로 돌아가고 만다. USB와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칼과 바꾼 파렴치한. 결국 한번 범죄자는 영원히 범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목격한 김동배를 죽이려고 병원에 급습한 인호는 결국 살인미수범으로 현장 체포당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김동배가 깨어나면 가장 불안할 사람, 그가 범인이다.
사고가 났고, 번호를 남긴 것, 미필적 고의로 이름만 남기지 않은 것. (최자혜가 판사에게)
분노도 미움도 사라지지 않는 감정은 없다. 용서의 고통, 가해자의 참회, 끔찍한 문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 그곳, 최자혜 변호사는 자신이 살았던 복수의 칼날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과연 복수가 죽은 딸을 다시 품을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용서로서 살아있는 자는 살아야한다는 운명의 굴레에 붙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