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새벽 2시, 눈이 떠졌다. 성경을 펼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오늘도 하루를 살아간다. 중년의 지금 나는 평생의 직업으로 작가의 삶을 살아간다. 기자로서, 작가로서, 지금의 현재에 매우 만족한다. 완성의 달인이 되기까지는 고달픈 광야길과 같아서 후회의 돌아봄을 자주 반복하였으나 지금은 행복하다. 이 길을 걸어오길 잘했다고 나는 스스로 생각한다.
어제 저녁 고마운 분의 전화를 받았다. 예기치 않은 까치의 찾아옴처럼 전화가 울려서 받았더니, 오래전에 들었던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고향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 혹은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처럼 정감이 있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과 사람은 관계를 형성한다. 산이 산과 연결되듯, 물이 물과 연결되듯, 사람은 사람으로 이어져 인맥을 형성하고 사회적 의미관계를 이어간다.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그렇게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이 나의 인생가운데 있다. 그런데 살다보면 서로의 감정이 얽히고 순수함이 흘려지면서 오해의 편견이 관계를 흔들어버린다. 틈은 벽이 되고, 벽은 트럼프 대통령이 쌓으려는 멕시코 장벽처럼 서로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단절은 곧 나눔과 결별이다.
결별의 어둠에서 나는 달팽이의 더듬이처럼 과거를 회상하였고, 새벽별처럼 명철한 가치(價値)와 인연(因緣)과 약속들을 재발견하였다. 그 중 하나가 어제 걸려온 소중한 분과의 사연도 포함되었다. 전화를 받고 내게 물어볼 어떤 내용이 있어서 아는 대로 소상히 설명하고, 입장을 가지런히 표현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해서 이야기를 드렸다. 그 사건은 내가 해결할 열쇠가 없었으므로 그 상황을 말씀 드리니, 이해를 하셨다. 그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내가 홀로 풀었다고 하여도 말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전달될 길이 없으므로, 진솔하게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였다.
내가 옳든, 내가 그르든, 나의 청년 시절에 더벅머리 총각으로서 미련스런 우직함으로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을 쳤었던 그 때 만난 그 소중한 인연을 망각하고, 지난 1년동안 폭풍이 치는 시간속에서 시련을 견디면서 다시 살아나기 위해 일어났던 그 간절함들은 결국 소중한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교육받고 양육받고 경험으로 얻은 신앙의 숨결들이었다. 내가 어찌 그것을 망각하랴. 또한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랴. 전화로 내 마음을 말로 표현하여, 형상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나니 속에 있던 것이 내려간 듯 기뻤다. 얽힌 것이 풀린 듯, 마음이 맑아졌다. 그렇다. 관계는 이렇게 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풀어주려고 하나님은 항상 사람의 사명자를 우연의 모습으로 보내시는 것이다. 매순간 하나님은 이렇게 찾아와서 사람의 마음에 꽃을 피우고 또 그렇게 물처럼 흘러가신다.
어제 나는 오전에 카톡으로 님의 사연을 전달받고, 저녁에 소중한 사람의 전화도 받고, 행복한 하루였다. 모든 얽힌 사건들이, 냉냉한 얼음들이 봄날 따스함에 모두 녹아 흘러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