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학과 진로는 기간설계에 따라 구분된다. 짧으면 진학, 길면 진로이다. 인생전체에 대한 설계가 진로이고, 단지 학업에 대한 목표와 설계는 진학이다. 고등학교때는 이과와 문과로 구분된다. 이는 큰 갈림길이 결정되는 것인데, 대학 학과에 대한 1차 갈림길이다. 대학교도 각 대학과 학과가 이과와 문과로 나뉜다. 요즘은 이동이 편하다고는 하지만, 이과와 문과는 완전히 다르다.
대학은 전공분야가 있다. 전공과 전문은 같은 말이다. 전공(專攻)에서 전(專)은 오로지 전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오직 그것이라는 only이다. 그것 하나 외에는 없는 것이 바로 ‘專’이다. 나는 기계설계학과이다. 나는 이 학과를 선택하고 열역학, 재료역학, 유체역학, 자동차공학, 전단력, 응력 등등 각종 공식들을 배우고 졸업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다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전공과 다른 사회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전공을 잘못 설계한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사회로 이어지는 진로의 길에 있어서, 대학교만 진로와 완전히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때 진학설계가 잘못된 것이다. 이처럼 진로설계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전문분야가 분명한 사람들이 좋다. 색깔이 뚜렷하면 대하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자기 색깔이 없으면 이게 회색도 아닌 것이, 이게 검정도 아닌 것이, 아주 피곤하다. 자기 색깔을 가져야만 모든 사람들과 함께 조화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SNS는 자기를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란 나로부터 출발해서 남과 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책설계가이다.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책을 의논한다. 내가 말을 하든, 안하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 이것이 책이고, 저것이 책인 것을 그냥 감각적으로 느낀다. 130권의 책을 쓰다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생각의 분석이다. 요즘은 대화를 나눠도 뭐가 책이라고 말을 잘 하지는 않는다. 나도 사회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전문분야이다. 전문분야가 정확한 사람은 결국 산의 정상에 오르게 된다. 전문분야가 불명확하면 정상에 오르기가 아주 어렵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 올라야할 목표가 하나면 오르기가 쉽지만, 목표가 불명확하면 산을 오르는 것도 아니고, 산을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산을 오르는지도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전문(專門)은 곧 목표를 의미한다.
궁수(弓手)가 활을 쏘는데 새 2마리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간혹 새 2마리가 잡힐 수는 있어도 이 또한 새 1마리를 목표로 해서 엉겹결이 다른 한 마리가 더 잡히는 것이지, 결코 새 2마리를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글자는 오직 1개의 뜻을 품듯, 1:1이 모든 원칙의 근본이다. 과녁은 1개인 것이다. 이것이 전문(專門)이다. 하늘에 해가 하나이고, 달이 하나이듯 그러한 것이다.
전문(專門)에서 ‘專’은 물레를 돌리는 손(寸 )을 의미한다. 재봉틀을 생각하면 쉽다. 물레를 돌리는 손은 반드시 앞으로만 전진하도록 되어있다. 뒤로 후퇴가 없다. 마치 새와 같다. 자전거와 같다. 사람은 앞걸음, 뒷걸음 할 수 있고 차도 전진 후진이 가능해도 새는 불가능하다. 그처럼 전(專)은 한쪽 방향으로만 돌릴 수 있게 설계되었다. 전(專)은 일방통행을 의미한다. 오직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바로 전(專)이다. 선택과 집중이 바로 ‘專’에 해당한다.
산의 정상에 아직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오르고 오르다보니 보여지는 산의 모습들이 많다. 바위들도 보이고, 절경도 아름답고, 내가 오르고 싶었던 저 너머의 산도 가보고 싶기도 하고, 가령 저 멀리 새로운 산이 탐험의 유혹을 손짓하기도 한다. 나는 그러한 모든 것을 관찰하면서 내가 오른 지금의 산이 좋다. 전문(專門)은 곧 자신의 가장 잘하는 그것을 의미한다. 나는 언론인이며, 책설계가이며, 블로그 전문가이다. 이것은 결국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 ‘글쓰기’이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도 자기 전문분야에 집중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