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질서는 무엇인가? 직선(直線)도 되고, 곡선(曲線)도 되고, 자유로움도 된다. 그 무엇이든 의미로 연결되어 디자인된 모든 것, 그것이 질서다. 질서를 가장 쉽게 표현하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자기 것이 아닌데, 가지려는 것이 욕심이며, 자기 자리가 아닌데, 앉아 있는 것이 무질서이다. 자기 자리는 과연 무엇인가?
어제 말씀의 핵심이었다. 질서있는 하나님, 무질서는 혼동과 어지럽힘을 주고, 질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인가? 나는 ‘수긍’(首肯)하였다. 성경에서 질서는 ‘하라’와 ‘하지 말라’로 나타난다. 하라는 것을 하는 것,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곧 법을 통한 질서이다. 이는 교통법과 같다. 수많은 차들이 자유롭게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체계는 빨간 신호등과 푸른 신호등 2가지다. 그 약속을 모두 신뢰하므로, 신호등을 따라 속도를 높이고, 멈추는 것이다. 이것이 곧 질서이다. 질서가 유지되는 기본 법칙, 그것은 신호등의 원리와 같다.
하와는 뱀같은 놈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하나님의 법이 점점점 흐려지다가 무단횡단하듯 범죄하므로 교통사고가 난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아담은 아내의 말을 무작정 따르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범했다. 그 사건이 창세기다. 대통령이라도 빨간 신호등에 횡단보도를 건너면 그것은 무단횡단이다. 하나님께서 금지할 때 그것을 했으니, 무질서였던 것이다.
질서(秩序)의 첨예한 대립은 드라마 해품달을 통해 감동깊게 표현되었다. 권력을 유지하려는 자들이 어떻게 질서를 바꾸는지, 그것을 통해 세상은 어떻게 혼탁하게 되었는지, “만물이 만물의 자리에, 자격있는 자에게 자격을,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순리를 따라 행하는 것”으로 드라마에서 정의된다. 야곱과 에서, 이삭과 이스마엘을 통해 하나님 입장의 질서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야곱과 에서에서 장자(長子)는 에서다. 먼저 태어났다. 어머니도 같고, 아버지도 같다. 질서는 곧 에서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했다. 야곱이 먼저 축복기도를 받으러 나간 것이 결정적 이유라고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는데, 그것은 상징일 뿐이다. 그 축복기도 이후 야곱은 살해위협을 받고 고향을 떠나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이삭의 상속자가 된 것이 결코 아니다. 이삭의 재산은 오히려 에서가 물려 받았다. 하나님이 보시는 장자(長子)와 사람이 생각하는 장자(長子)가 다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 축복기도 사건으로 야곱의 하나님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상징적 사건으로, 평소 야곱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이것이 곧 질서다.
야곱이 경쟁하듯 먼저 이삭에게 요리를 해서 나가듯 그렇게 1등의 심리를 부추키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자들은 무질서를 조장할 뿐이다. 그러한 자들은 에서가 먼저 요리를 해서 이삭에게 나갔다면 축복이 에서에게 갔다고 생각하는 족속들이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무질서의 시작일 뿐이다. 축복기도는 곧 하나님을 믿고 살라는 것인데, 에서가 그렇게 행하지 못할 것이 불보듯 뻔한데, 축복기도를 받는다고 해서 무엇이 다를 것인가? 게다가 에서는 축복기도를 받지도 않았지만 이삭의 상속을 받았으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미 이뤘다.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긴 팥죽 사건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던 에서의 사춘기 시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야곱은 늘 어머니 리브가의 멘토링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앙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것이 근본을 따지는 질서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을 논할 때는 ‘피’(血)와 ‘약속’으로 논한다. 모두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는 다르다.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난 자가 네 상속자가 된다”라고 약속했다. 이때 “네 몸”은 곧 사라를 말한다. 사라를 통해 태어난 이삭이 곧 약속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적 장자가 된 것이다. ‘사라를 통해 태어난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어서 그렇다. 반면 하갈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고, 나중에 다른 약속을 받았다.
약속의 자녀로 태어난 이삭에서 이스라엘이 나왔고, 지금의 유대교가 되었다. 그 이스라엘이 과연 약속의 민족이 되었는가? 아니다. 약속의 자녀에서 나왔으나 그들은 혈통의 민족이 되고 말았다. 약속은 곧 법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혈육과 약속은 완전히 다르다. 이삭이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늘 하나님의 약속을 사모하였고, 본인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곧 질서의 근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약속의 자녀가 됨으로 영적 장자가 되는 것이다. 야곱이 에서보다 월등해서 축복기도를 받은 것이 아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므로 그 축복기도를 받은 것이다. 이삭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칼끝에서 죽음을 직면한 이삭이었으나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성을 깊게 체휼하고 신앙의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축복을 간혹 착각한다. 보물을 발견하거나 로또에 당첨된 것으로, 착각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씨앗으로 오고, 밤송이로 나타난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거주하는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지 못함으로 저주의 심판을 받았다. 축복이 곧 심판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유대인은 예수님의 출현을 맞았다. 그런데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여 버렸다. 헤롯은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들었다.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 축복의 소식을 듣고도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축복은 작은 씨앗으로 출현하고, 그것을 어떻게 귀하게 여길지, 밤송이의 밤톨을 조심스럽게 싸면서 축복의 가치를 알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얄팍한 신앙은 뿌리가 깊지 못해 신앙의 열매가 열리지 못한다. 질서(秩序)는 곧 자기 만들기이고, 내면을 깊게 숙성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약속의 장자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이 있는데, 육과 혼이 보다 영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질서이다.